[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전,란’의 인기가 뜨겁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인을 한국식 요리 경연 프로그램의 매력에 빠지게 만든 화제작 ‘흑백요리사’를 2위로 밀어내고 콘텐츠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다.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이라는 명배우들의 열연과 짜임새 있는 스토리, 소재의 참신함이 더해져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조선 최고 무신의 아들(박정민)과 그의 몸종(강동원)이 신분의 차이를 넘어 깊은 우정을 쌓으며 성장했지만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왕의 무사와 의병으로 다시 만나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는 설정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축이다. 흥미롭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몇몇 포인트가 있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 임진왜란은 양반과 노비, 관군과 의병, 승려와 사대부가 혼연일체가 돼 국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존립을 지켜낸 처절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려진 임금은 지나치게 무능하고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지나치게 공감 능력이 결여돼 있다. 대부분의 양반 계층 또한 그렇다. 반면 민중은 선하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움 그 자체로 묘사된다. 중간은 없고 계급과 계층에 따른 선악이 무 자르듯 나뉘어 서사가 진행된다. 극적 표현의 정석이라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대중문화에 이 정도 각색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꾸짖을 사람도 있겠지만 문제는 비단 이 영화 한 편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한국 영화계 전반, 나아가 드라마·문학을 망라한 문화예술계 전반에 만연한 이분법적 계급주의의 흐름 속에 ‘전,란’이라는 영화가 하나의 점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상 수상이라는 전인미답의 고지에 오른 영화 ‘기생충’, 무려 1300만 명이 본 영화 ‘베테랑’에서 그려진 부자와 기업인은 몰상식하고 공감 능력이 결여돼 있고 비도덕적이기까지 하다. 10·26을 소재로 한 ‘남산의 부장들’에서 대통령과 통치세력은 국민의 안위나 나라의 발전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권력 그 자체만 좇는 탐욕스러운 존재로 그려진다.이런 도식화된 이분법이 만연한 대중문화계가 만들어낸 콘텐츠들은 은연중에 사회의 통일성을 흔들고 대다수 소비자들에게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유하는 큰 공통점보다 그런 차이에 집중하게 만든다. 건강한 사회 가치와 인식은 이렇게 형성되는 것일까.창작물에서 그려지는 사회 지도층의 과장된 위선과 탐욕을 클로즈업하고 민중의 모든 위법과 무질서를 정의로운 저항으로 분칠하는 관행과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 사회의 통합과 갈등 치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되레 법을 어기고 사회 질서를 흔드는 것을 영웅시하기까지 하는 일련의 경향성이 문화예술계 내에 분명히 존재한다. 부와 권력을 가진 것 자체가 악일 수 없고 가난하고 힘없다는 사실이 선함을 담보하지 않는다. 아이러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우리 문학계, 나아가 온 나라와 국민의 쾌거이고 경사다. 멋진 일이다. 대한민국 만만세다. ‘우리 이 정도다’ 자부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미묘하고 첨예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그의 시선이 아쉽다는 지적도 공존한다. 정상적이다. 획일적 쏠림보다는 사회가 건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5.18과 4.3이라는 극도로 복잡하고 미묘한 사건을 국가의 폭력과 민중의 저항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 가두어 놓고 등장인물들에게 과도한 피해자성을 부여한다. 민중의 저항만을 부각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안 불의의 피해자가 된 군인과 경찰, 공무원의 희생은 없는 일처럼 밀려나고 만다. 그들 또한 역사와 시대 그리고 사회의 소용돌이에 희생자일 수 있음을 간과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에 내재된 비틀기는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오늘의 시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 고정된 관점을 강요하고 온 국민이 과거의 상처를 붙들고 과거에 붙들려 있도록 이끈다. 아픔이다. 흔히 한민족을 한(恨)의 민족이라 한다. 가난과 억압, 끝없는 외침과 수탈로 얼룩진 반만년 역사가 심어 놓은 민족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불과 50년 만에 그 모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유사 이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나라를 가꾸었다. 이제는 전근대의 아픔에서 비롯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당당하게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우린 경제적 성취는 물론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워낸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우린 더 큰 내일도 꿈꿀 수 있다. 미국 영화에는 꼭 중요한 순간에 성조기와 독수리가 빈번히 등장함을 보게 된다. 그 장면이 꼭 필요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유난스러워 보이는 이 작은 상징은 미국이 강조하는 통합과 ‘그레이트 아메리카’(Great America) 자부심의 발로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는 아메리카 퍼스트는 미국의 중심부에서 작은 도시까지 샅샅이 스며들어 국민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자극하는 중요한 문화적 콘텐츠로 자리잡고 있다. 결국 애국심을 문화적 우월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도 태극기와 무궁화가 곳곳에 등장하는 미시적 ‘국뽕’(자국 찬양) 퍼레이드는 안 될까.세계에 할 말 하는 나라, 우리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나라. 이제 국뽕이라도 할 때 아닌가. 잃어버린 통합적 가치도 지향점 아닌가. 그 길로 나아가려면 먼저 영화가, 소설이, 드라마가 성장과 회복, 진취와 통합을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대중문화 창작자들이 피해자 마인드를 벗어던지고 승리한 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발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걸맞은 문화 선진국에 오르는 길이고 K-문화의 자부심이 완성되는 길이다. 우리도 한번 시작해 보자, ‘그레이트 코리아!’(Great Korea!)
장기표와 김형석의 가치와 도덕
최은영 기자2024.10.10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장기표가 우리 곁을 떠났다. 김근태, 이부영과 함께 재야의 삼두마차로 불리며 민주화 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제도권 정치에 도전했으나 그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영원한 재야’로 남았다.장기표는 시종일관, 떠나는 순간까지도 ‘가치와 도덕’을 외쳤다. 그가 생각하는 바른 정치는 올바른 가치관을 굳게 지키고 무너진 도덕성을 다시 회복하는 데 있었던 듯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인터뷰엔 “사랑이 넘칠 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이라고 했고 “도덕 없이 능력만 있으면 그게 도둑놈이다. 정치인의 통찰력은 좋은 머리와 책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 생활이 발라야 한다”고도 했다. 민주화 운동 유공자임에도 보상금을 단칼에 거절한 기개도, 노구를 이끌고 목이 터질세라 국회의원 특권을 없애자고 외친 절실함도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올바른 가치와 도덕성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그만의 실천이었다.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부와 물질의 바벨탑을 쌓는 데만 몰두하며 정직, 염치, 겸양, 사랑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을 외면해 왔다. 사회 운영의 규칙과 질서를 만드는 정치인들이 검찰과 법원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날락하면서도 부끄러움이 없고 범죄 이력이 만천하에 드러나도 기어이 대통령,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마이크를 잡는 시대다.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오늘의 이러한 세태를 두고 최근 한 칼럼에서 “경제적 민생보다 소중한 삶의 가치로서의 정신적 민생은 누가 책임지는가”, “더 이상 정신적 가치와 질서를 역행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재야와 진보를 상징하는 장기표와 오랜 세월 양심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살아온 김형석의 목소리가 공명하고 있다.도덕과 가치가 상실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는 위기 때 극명히 드러난다. 지도자들이 바른 가치관 위에 서 있는 나라는 국민의 기꺼운 지지를 받아 뭉치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분열과 각자도생으로 무너지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지 돌아보자.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 신뢰와 애정을 보낼 정치인이 있는가. 경제, 문화, 의료, 법조계는 어떤가. 이익 앞에 무분별하게 집단행동하고 힘 있으면 법치를 우회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저 선진사회로 가기 위한 성장통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치다. 가치와 도덕은 이미 실종 상태다. 국가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정치 집단의 행태는 거의 자해극 수준이다. 미래와 젊은이, 다음 세대를 위한 오늘을 경영하는 것이 지금 세대의 기본적 책무인데 보여주는 행태는 가히 전범(典範)적 몰가치, 탈도덕의 사례로 점철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그림과 그 실행 방식, 세계 속의 우리 미래 모습을 제시하고 전 국민을 한 덩어리로 모아 함께 나아가자고 외치는 지도자의 모습은 참 그립기만 한 꿈이다. 국제적으로 할 말 하는 나라, 살 만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첩경은 가치의 회복과 도덕의 진작에 있고 이는 지도자의 기본 덕목이자 모든 국민이 지향해야 할 가치다.도산 안창호 선생의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는 명언이 불현듯 떠오른다. 청년의 교육과 양성을 위해 평생 교육운동과 청년운동에 앞장선 그의 선구안과 열정을 이어받을 국가 지도자는 정녕 찾기 힘든 것인가. 출산율은 끝없이 내려가고 사지 멀쩡한 ‘청년 백수’가 130만 명에 육박한다. 귀한 우리의 자산이 낭비되고 있는데 국가 지도자층은 어떤 가치와 도덕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민족과 국가를 향한 사랑과 헌신의 정신이 부재하지는 않은지 하는 우려와 함께….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그들을 롤 모델 삼아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데 자격 미달인 사람들이 자꾸 늘어만 간다. 정파와 정쟁을 상대편의 상처를 목표로 하는 대의 정치의 아수라는 그저 국민의 정신세계와 인식 체계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다음 세대를 위해 시대적 사명은커녕 독신(獨愼)과 양심조차 저버리고 있다. 가히 교과서에 기록될 정도의 치졸함의 극치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준다. 믿고 맡긴 대의 대리인이 22대 총선 후보자 등록을 마친 총 952명 중 전과기록을 보유한 후보가 전체의 32%에 달한다는 발표는 충격 그 자체였다. 무려 3명 중 1명이 범죄자인 최악의 선택지 속에서 선택과 책임은 오롯이 국민의 몫이 돼 버렸다. 미흡하게 이뤄진 후보자 검증의 결과는 법을 어긴 전과자가 법을 만드는 앞뒤가 안 맞는 정치판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총체적 난국이다. 이제는 일상의 흔한 실수나 실패가 아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의도적이고 파렴치한 범죄자는 입후보 출마를 막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서민을 울리는 권력형 부패 부동산 사기, 금전 사기, 강력범죄, 음주운전 등의 범죄는 원천적 결격사유다. 특히 법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범죄는 절대 불가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을 전면으로 거부한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할 수 있도록 공직 결격 사유로 정해야 한다. 아주 오래된 사건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용이 필요하겠지만 파렴치 범죄는 칼같이 차단하는 등 경중을 따져 공직자의 희화화를 멈춰야 한다. 진정으로 뉘우쳤다면 사회를 위하는 길은 정치와 공직 말고도 많다. 가치와 도덕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근본적 질서의 원천이다. 가치와 도덕이 무너지면 질서가 무너지고 질서가 무너지면 법치가 무너지고 우리는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가치와 도덕을 택할지 각자도생의 야만을 택할지는 전적으로 우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정치인들의 거짓과 위선에 단호히 아니라고 외치고 사회지도층의 집단 이기주의에 따끔한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다. 타인을 배려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기본이라도 좀 지키자는 말이다. 장기표는 ‘돈보다 명예, 물질보다 정신’이라고 했다. 그 목소리를 기억하자. 대한민국의 미래 소프트 파워는 정신적 가치의 회복과 실용화가 시작점이다. 철학적 사유와 인문의 실종은 쇠국(衰國)의 길임을 명심하자.
‘주4일’ 저출산 대책, 본질은 가치에 있다
최은영 기자2024.09.05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 최근 전국의 지자체들 사이에서 주 4일제 실시가 유행이라고 한다. 공무원부터 이런 흐름을 보이는 것과 재택근무의 효용성과 업무 인과성을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고 확산하는 것을 보니 이 정책의 내일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임신했거나 어린아이가 있는 공무원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재택근무를 하게 하는 것이다. 대전의 경우 주1회 재택근무와 함께 하루 2시간 범위에서 휴식과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모성보호 시간을 부여한다.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키우는 공무원은 주1회 이상 또는 월4회 이상 자녀 돌봄 육아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서울은 8세 이하 자녀를 키우는 공무원에게 주 1회 재택근무를 의무화하고 4급 공무원 목표 달성도 평가에 어린아이를 둔 공무원의 재택·유연 근무 사용 실적을 포함시키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충남도는 2세 이하 자녀를 둔 공무원 대상 주1회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육아휴직자에게 근무평정 가점을 준다. 전 세계에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지자체들의 이러한 움직임이 십분 이해된다. 나라가 소멸할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다양한 형태의 저출산 대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젊은 공무원들에게 조금이라도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지자체장들의 책임감도 칭찬받을 만하다.그러나 이런 땜질식 처방, 산발적 정책이 유의미한 출산율 반등을 이끌 것인가 하는 물음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결혼과 임신, 출산은 눈에 보이는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가치관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주 3일, 주 2일, 나아가 일주일에 하루도 출근하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이를 방증하듯이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52.9%, 남성의 33.1%가 출산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 결국 여건보다는 출산에 대한 욕구나 희망, 가족이 주는 행복 등의 가치와 회복이 문제의 본질 중 으뜸인 것이다. 2006년부터 2023년까지 17년간 물경 280조원을 저출산 대책 예산으로 집행했다. 별 관련 없는 사업들도 저출산 예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집행하기도 하고 총괄 지휘를 맡을 컨트롤타워 없이 중구난방으로 집행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 사회는 지난 십수 년 동안 많은 돈을 써왔다. 만약 그 돈을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젊은 부모들에게 직접 지원했다면 아이를 더 많이 낳았을까? 글쎄, 남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사회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나라에서 수백, 수천만원을 직접 쥐여준다 한들 산후조리원 이용 요금만 올라갈 것이다.사람들이 ‘결혼은 구속, 임신은 족쇄, 양육은 고통’이라 생각하는 한 돈을 아무리 많이 주고 일하는 시간을 줄여줘도 출산율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결혼은 구원, 임신은 축복, 양육은 행복’이라 생각하면 비록 살림은 팍팍하고 몸은 피곤해도 아이를 낳을 것이다. 물론 현금성 지원, 보육 편의 제공도 중요하다. 지금껏 우리 사회가 그 문제에 안일했다는 점을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고치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지자체의 주 4일제 도입은 앞으로 더 큰 변화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정책들보다 더 중요한 가치관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이 모든 대책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사회 전반적으로 가정은 곧 안정과 행복의 원천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워야 한다.1970, 80년대 나라에서 폭증하는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온갖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정작 변화를 이끌어 낸 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였다. 그 구호가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하고 사람들의 내면에 받아들여지면서 산아제한정책은 성공할 수 있었다.정책의 우선순위를 ‘가치’에 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가족의 가치, 아이가 주는 행복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고 거기에 돈을 써야 한다. 임신과 출산, 육아가 공포와 부담이 아닌 기쁨과 성취로 받아들여지면 낳지 말라고 해도 낳을 것이다.세계적 현상인 개인주의의 확산은 삶의 생존과 의미를 다양한 색깔로 인식한다.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다른 선택이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 행복의 현세화에 대한 시각도 바뀌고 있다. 이렇게 변화한 결과의 산물로 나타난 저출산은 선진국 공통의 현상이고 심지어 중국에서도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더욱 극심하게 반응할까. 사회의 위기와 연동해 생각해 보면 미래의 불안을 부추기는 쓸데없는 잡음(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인생의 부담)과 분절적 분쟁(남 탓, 환경 탓으로 돌리는 제반 현상)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늘 가치의 충돌은 역사 속에 있어 왔고 우린 우여곡절 끝에 바른 방향으로 수정해 왔다. MZ세대의 저출산 현상은 선진국일수록 당연한 결과라고 하지만 미국도, 유럽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작년 미국과 영국은 출산율 1.62명, 1.42명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2배가 넘는 수치다. 과연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출산율 꼴찌를 할 만큼 정말 살기 힘들고 애 낳기 어려운 환경일까? 의무는 외면한 채 권리만 주장하는 개인주의를 가장한 이기주의에 마음이 씁쓸하다. 개인과 사회 선상에서 바람직한 개인주의는 어떤 것인지도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 미국은 개인의 행복이 가족과 가정 속에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로 사회 분위기를 유도한다. 우리도 그 가족 중심적 문화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사회 분위기와 인식에 기인하는 것이 많고 인식의 기초는 가치에서 온다. 이제 출산 환경과 함께 가치의 문제에 사회적 일념과 열망이 모여야 할 때다. 돈 주면 애 낳을까. 행복하면 애 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