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콘텐츠부

전재욱

기자

그해 오늘

  • "헤어진 여친 고통 주려"…군인 살해·총기탈취한 남성[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7년 12월 6일 오후. 인천 강화도 황산도 선착장 해안도로에 도난 신고된 코란도 승용차가 정차돼 있다. 차량에 탑승한 인물은 조모(당시 35세)씨. 그는 평소 해당 도로를 통해 해병대 병사들이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차량에 흉기를 싣고 기다리던 조씨는 이날 오후 5시30분께 해병대 병사 A씨와 B씨가 자신의 차량을 지나쳐 걸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들과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 곧바로 자신의 차량을 움직여 이 병사들을 시속 20㎞ 속도로 들이받았다. 두 병사를 들이받은 차량은 유턴을 해 쓰러진 두 병사 인근에 멈춰 섰다.인천 강화도 총기탈취 사건 범인 조모씨. (사진=연합뉴스)조씨는 쓰러진 A씨에게 다가가 “다친 데 없느냐”고 안심시킨 후, 곧바로 소총을 빼앗으려 했다. 조씨는 A씨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차량에서 가지고 온 흉기를 마구 휘두른 후 총을 빼앗았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중상을 입었다.A씨를 제압한 조씨는 곧바로 인근에 쓰러져 있던 B씨에게 다가갔다. B씨가 저항하자 이번에도 흉기로 수차례 찌른 후 탄약과 수류탄 등을 빼앗았다. 크게 다친 B씨는 결국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범행 후 자신의 차량을 타고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간 조씨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경기도 화성에서 자신의 차량에 불을 질렀다. 최전방 지역에서 대낮에 무장한 군인을 대상으로 한 범행에 군과 경찰은 비상이 걸리며 최고 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군경합동수사본부는 목격자와 생존 병사의 증언 등을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하고 전국에 공개수배했다. 언론에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조씨는 도피를 시작했다.사건의 파장이 커지는 와중에 사건 발생 5일 후인 12월 11일 조씨는 경찰에 자수 편지를 보내 “전남 장성 백양사휴게소 인근에 총기를 묻었다”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곧바로 무기를 모두 회수하는 한편 편지에 남은 지문을 조회해 조씨의 신원을 특정하고 12일 서울에 숨어 있던 조씨를 검거했다.2007년 12월 8일 해병대 2사단에서 열린 총기탈취 사건의 희생자 해병대 병사 B씨의 영결식에서 유가족이 헌화 중 오열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수사결과 조씨는 어처구니없는 동기로 범행을 저질렀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자 심리적 복수를 하기 위해 총기를 탈취해 추가 범행을 계획한 것이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 “내가 죽거나 감옥에 가면 여자친구가 자책하고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고 전 여자친구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고 싶었다”고 진술했다.조씨는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초병살해, 군용물강도살인, 초병상해, 군용물강도상해 등의 군법을 적용해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심인 해병대사령부 보통군사법원은 2018년 4월 “사전에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고 총기탈취 목적 달성을 위해 흉기를 휘두르고 급기야 초병을 살해했다”며 사형을 선고했다.하지만 2심인 고등군사법원은 조씨가 병사들 충돌 시 브레이크를 밟았고 처음부터 흉기를 사용하지 않았던 점 등을 근거로 “초병살해 고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5년을 선고했다.재판부는 “당시 조씨가 피해 병사들이 초병으로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보기 어렵고, 단순히 부대로 복귀하거나 근무하기 위해 이동 중에 있다고 인식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같은 해 12월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조씨는 가석방이나 감형을 받지 않았을 경우 이달 11일 만기 출소할 것으로 보인다.
    한광범 기자 2022.12.06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7년 12월 6일 오후. 인천 강화도 황산도 선착장 해안도로에 도난 신고된 코란도 승용차가 정차돼 있다. 차량에 탑승한 인물은 조모(당시 35세)씨. 그는 평소 해당 도로를 통해 해병대 병사들이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차량에 흉기를 싣고 기다리던 조씨는 이날 오후 5시30분께 해병대 병사 A씨와 B씨가 자신의 차량을 지나쳐 걸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들과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 곧바로 자신의 차량을 움직여 이 병사들을 시속 20㎞ 속도로 들이받았다. 두 병사를 들이받은 차량은 유턴을 해 쓰러진 두 병사 인근에 멈춰 섰다.인천 강화도 총기탈취 사건 범인 조모씨. (사진=연합뉴스)조씨는 쓰러진 A씨에게 다가가 “다친 데 없느냐”고 안심시킨 후, 곧바로 소총을 빼앗으려 했다. 조씨는 A씨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차량에서 가지고 온 흉기를 마구 휘두른 후 총을 빼앗았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중상을 입었다.A씨를 제압한 조씨는 곧바로 인근에 쓰러져 있던 B씨에게 다가갔다. B씨가 저항하자 이번에도 흉기로 수차례 찌른 후 탄약과 수류탄 등을 빼앗았다. 크게 다친 B씨는 결국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범행 후 자신의 차량을 타고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간 조씨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경기도 화성에서 자신의 차량에 불을 질렀다. 최전방 지역에서 대낮에 무장한 군인을 대상으로 한 범행에 군과 경찰은 비상이 걸리며 최고 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군경합동수사본부는 목격자와 생존 병사의 증언 등을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하고 전국에 공개수배했다. 언론에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조씨는 도피를 시작했다.사건의 파장이 커지는 와중에 사건 발생 5일 후인 12월 11일 조씨는 경찰에 자수 편지를 보내 “전남 장성 백양사휴게소 인근에 총기를 묻었다”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곧바로 무기를 모두 회수하는 한편 편지에 남은 지문을 조회해 조씨의 신원을 특정하고 12일 서울에 숨어 있던 조씨를 검거했다.2007년 12월 8일 해병대 2사단에서 열린 총기탈취 사건의 희생자 해병대 병사 B씨의 영결식에서 유가족이 헌화 중 오열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수사결과 조씨는 어처구니없는 동기로 범행을 저질렀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자 심리적 복수를 하기 위해 총기를 탈취해 추가 범행을 계획한 것이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 “내가 죽거나 감옥에 가면 여자친구가 자책하고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고 전 여자친구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고 싶었다”고 진술했다.조씨는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초병살해, 군용물강도살인, 초병상해, 군용물강도상해 등의 군법을 적용해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심인 해병대사령부 보통군사법원은 2018년 4월 “사전에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고 총기탈취 목적 달성을 위해 흉기를 휘두르고 급기야 초병을 살해했다”며 사형을 선고했다.하지만 2심인 고등군사법원은 조씨가 병사들 충돌 시 브레이크를 밟았고 처음부터 흉기를 사용하지 않았던 점 등을 근거로 “초병살해 고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5년을 선고했다.재판부는 “당시 조씨가 피해 병사들이 초병으로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보기 어렵고, 단순히 부대로 복귀하거나 근무하기 위해 이동 중에 있다고 인식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같은 해 12월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조씨는 가석방이나 감형을 받지 않았을 경우 이달 11일 만기 출소할 것으로 보인다.
  • "사랑의 징표는 뒷돈 아니다"…벤츠 여검사 '나비효과'[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1년 12월 5일 새벽. 불과 보름여 전까지 검사였던 30대 여성 이모씨가 서울 자택에서긴급체포돼 부산지검으로 압송됐다. 혐의는 알선수뢰였다. 검사 시절 지위를 이용해 다른 검사의 사건 처리 대가로 내연관계였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최모(당시 40대)씨에게 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소위 ‘벤츠 여검사’로 불렸던 전직 검사 이모씨가 2012년 1월 27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씨는 검사 임용 전 변호사 시절인 2007년께부터 최씨와 내연관계를 맺고 검사 재직 기간 동안에도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변호사 시절부터 최씨로부터 지속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최씨가 임대료를 내는 아파트에서 거주했고 최씨로부터 현금이나 카드를 받아 사용하기도 했다. 보석이나 명품 등 고가의 선물을 수차례 받기도 했다.최씨의 복잡한 여자관계로 갈등이 생기자 최씨는 이씨에게 ‘사랑의 정표’라며 2008년 2월부터 자신의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게 했다. 그리고 2009년 4월부터 벤츠 승용차는 이씨가 나홀로 사용했다. 이씨는 2010년 5월부터 최씨 법무법인 명의 신용카드를 제공받아 명품을 사는 등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부산·창원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최씨는 2010년경부터 부동산 사업 동업자와 갈등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그는 2010년 5월 동업자 A씨를 횡령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이씨에게 법무법인 신용카드를 제공할 무렵이었다.◇‘동업자 고소건 신속처리 부탁해달라’ 청탁받아동업자 고소 사건이 수사가 지지부진하다고 느낀 최씨는 2010년 9월 이씨에게 A씨 고소 사실을 알려주고 A씨 인적사항과 사건 진행상황을 알려줬다. 그리고 2010년 10월 초 이씨가 고소사건에 진행상황에 대해 다시 물었고 최씨는 “사건이 빨리 처리돼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에 이씨는 “담당 검사가 내 임관 동기니까 알아봐 주겠다”고 밝히자, 최씨는 “사건 알아봐 주려면 담당 검사에게 연락해 빨리 처리하도록 말 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씨는 한 달 후에도 비슷한 부탁을 다시 이씨에게 전했다.실제 이씨는 사건 주임검사에게 “사건을 가급적 신속하게 처리해주면 좋겠다”는 취지의 부탁을 했다. 최씨의 계속된 부탁엔 “뜻대로 전달했다. 영장청구도 고려해 보겠다고 한다”, “담당검사한테 말해뒀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또 추가 고소를 결심한 최씨에게 고소장 접수에 대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검찰은 이틀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한 후 하루 뒤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는 알선수뢰가 아닌 알선수재를 적용했다. 다른 검사 사건 처리와 관련해 돈을 받은 것은 맞지만 검사 지위를 이용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법원이 6일 이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함에 따라 이씨는 구속됐다. ‘벤츠 여검사’ 이모씨의 내연남이었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최모씨는 또 다른 내연녀를 감금·폭행한 혐의 등으로 2015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아 변호사 등록이 취소됐다. (사진=연합뉴스)검찰은 같은 달 23일 이씨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이씨가 최씨로부터 A씨 고소사실을 들은 시점부터 사용한 법인카드 이용금액과 차량 이용료 합계 5591만원을 ‘재산상 이익’으로 판단했다.하지만 이씨는 “내연관계였던 최씨가 이전에 해오던 대로 경제적 지원 차원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하고 사랑의 증표로서 벤츠를 준 것일 뿐”이라며 “알선 대가가 아니다”고 항변했다.◇1심, 기소 5주만에 ‘징역 3년 선고’→2심서 파기 1심 재판부는 기소 5주 만인 이듬해 1월 27일 이씨의 알선수재 혐의가 인정된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4462만원 추징하고 최씨로부터 받은 핸드백 등에 대한 몰수도 명령했다. 다만 임신상태였던 이씨의 보석신청을 허가했던 1심 재판부는 같은 사유를 들어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1심은 “수수한 이익에 알선행위 대가 외에 내연관계에 따른 경제적 지원 명목이 포함돼 있더라도 이는 알선행위 대가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돼 있다”이라며 “이씨도 단순히 내연의 관계에 따른 경제적 지원을 넘어 청탁에 대한 대가의 성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이씨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2심은 1년에 가까운 심리 끝에 2012년 12월 이씨가 받은 금품과 청탁 사이의 대가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은 “금품 교부 시점과 청탁 시점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고 청탁 이전과 이후로 경제적 지원이 늘지 않았다”며 “동료 검사에게 한 전화도 내연관계에 있던 최씨를 위해 호의로 한 것이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검찰이 상고했지만 대법원도 2년 3개월의 심리 끝에 2015년 3월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이씨에 대한 2심 무죄 판결로 공직자 등의 직무상 관련이 없는 금품수수를 금지하는 내용의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 입법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2011년 취임초부터 공직사회 투명성 강화를 위해 입법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해와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불렸다. 정부안이 2013년 8월 국회에 제출됐고 2015년 3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돼, 이듬해 9월 시행됐다.
    한광범 기자 2022.12.05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1년 12월 5일 새벽. 불과 보름여 전까지 검사였던 30대 여성 이모씨가 서울 자택에서긴급체포돼 부산지검으로 압송됐다. 혐의는 알선수뢰였다. 검사 시절 지위를 이용해 다른 검사의 사건 처리 대가로 내연관계였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최모(당시 40대)씨에게 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소위 ‘벤츠 여검사’로 불렸던 전직 검사 이모씨가 2012년 1월 27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씨는 검사 임용 전 변호사 시절인 2007년께부터 최씨와 내연관계를 맺고 검사 재직 기간 동안에도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변호사 시절부터 최씨로부터 지속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최씨가 임대료를 내는 아파트에서 거주했고 최씨로부터 현금이나 카드를 받아 사용하기도 했다. 보석이나 명품 등 고가의 선물을 수차례 받기도 했다.최씨의 복잡한 여자관계로 갈등이 생기자 최씨는 이씨에게 ‘사랑의 정표’라며 2008년 2월부터 자신의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게 했다. 그리고 2009년 4월부터 벤츠 승용차는 이씨가 나홀로 사용했다. 이씨는 2010년 5월부터 최씨 법무법인 명의 신용카드를 제공받아 명품을 사는 등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부산·창원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최씨는 2010년경부터 부동산 사업 동업자와 갈등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그는 2010년 5월 동업자 A씨를 횡령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이씨에게 법무법인 신용카드를 제공할 무렵이었다.◇‘동업자 고소건 신속처리 부탁해달라’ 청탁받아동업자 고소 사건이 수사가 지지부진하다고 느낀 최씨는 2010년 9월 이씨에게 A씨 고소 사실을 알려주고 A씨 인적사항과 사건 진행상황을 알려줬다. 그리고 2010년 10월 초 이씨가 고소사건에 진행상황에 대해 다시 물었고 최씨는 “사건이 빨리 처리돼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에 이씨는 “담당 검사가 내 임관 동기니까 알아봐 주겠다”고 밝히자, 최씨는 “사건 알아봐 주려면 담당 검사에게 연락해 빨리 처리하도록 말 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씨는 한 달 후에도 비슷한 부탁을 다시 이씨에게 전했다.실제 이씨는 사건 주임검사에게 “사건을 가급적 신속하게 처리해주면 좋겠다”는 취지의 부탁을 했다. 최씨의 계속된 부탁엔 “뜻대로 전달했다. 영장청구도 고려해 보겠다고 한다”, “담당검사한테 말해뒀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또 추가 고소를 결심한 최씨에게 고소장 접수에 대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검찰은 이틀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한 후 하루 뒤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는 알선수뢰가 아닌 알선수재를 적용했다. 다른 검사 사건 처리와 관련해 돈을 받은 것은 맞지만 검사 지위를 이용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법원이 6일 이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함에 따라 이씨는 구속됐다. ‘벤츠 여검사’ 이모씨의 내연남이었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최모씨는 또 다른 내연녀를 감금·폭행한 혐의 등으로 2015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아 변호사 등록이 취소됐다. (사진=연합뉴스)검찰은 같은 달 23일 이씨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이씨가 최씨로부터 A씨 고소사실을 들은 시점부터 사용한 법인카드 이용금액과 차량 이용료 합계 5591만원을 ‘재산상 이익’으로 판단했다.하지만 이씨는 “내연관계였던 최씨가 이전에 해오던 대로 경제적 지원 차원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하고 사랑의 증표로서 벤츠를 준 것일 뿐”이라며 “알선 대가가 아니다”고 항변했다.◇1심, 기소 5주만에 ‘징역 3년 선고’→2심서 파기 1심 재판부는 기소 5주 만인 이듬해 1월 27일 이씨의 알선수재 혐의가 인정된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4462만원 추징하고 최씨로부터 받은 핸드백 등에 대한 몰수도 명령했다. 다만 임신상태였던 이씨의 보석신청을 허가했던 1심 재판부는 같은 사유를 들어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1심은 “수수한 이익에 알선행위 대가 외에 내연관계에 따른 경제적 지원 명목이 포함돼 있더라도 이는 알선행위 대가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돼 있다”이라며 “이씨도 단순히 내연의 관계에 따른 경제적 지원을 넘어 청탁에 대한 대가의 성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이씨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2심은 1년에 가까운 심리 끝에 2012년 12월 이씨가 받은 금품과 청탁 사이의 대가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은 “금품 교부 시점과 청탁 시점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고 청탁 이전과 이후로 경제적 지원이 늘지 않았다”며 “동료 검사에게 한 전화도 내연관계에 있던 최씨를 위해 호의로 한 것이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검찰이 상고했지만 대법원도 2년 3개월의 심리 끝에 2015년 3월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이씨에 대한 2심 무죄 판결로 공직자 등의 직무상 관련이 없는 금품수수를 금지하는 내용의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 입법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2011년 취임초부터 공직사회 투명성 강화를 위해 입법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해와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불렸다. 정부안이 2013년 8월 국회에 제출됐고 2015년 3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돼, 이듬해 9월 시행됐다.
  • "살인 아니다. 믿어달라"던 뻔뻔한 엽기살인마 '박춘풍'[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4년 12월 4일 오후 1시 무렵.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등산로에서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됐다.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시신은 한 등산객에 의해 발견됐다. 신체 일부만 발견된 시신은 잔혹하게 토막 난 상태였다. 경찰은 시신을 국립수사과학연구원에 보내 부검을 의뢰하는 한편 추가 시신을 찾기 위해 인근을 수색했다.추가 시신 발견과 피해자 신원 특정에 애를 먹던 경찰은 시민들의 제보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한 중국 동포 여성이 같은 달 8일 “지난달 26일부터 여동생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같은 달 8일 늦은 밤 가출신고를 한 것이다. 경찰은 신고한 여성의 DNA를 채취해 국과수에 보냈다. 국과수는 해당 여성 A씨의 DNA를 통해 시신의 신원을 특정했다.동거녀 살인범 ‘박춘풍’. (사진=연합뉴스)같은 달 11일 오전 경찰은 수원천에서 시신이 담긴 비닐봉지들을 추가로 발견했다. 그리고 당일 한 시민이 “월세방을 계약한 중국 동포 남성이 입주시기가 지났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해당 월세방의 위치는 시신들이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경찰은 해당 남성에게 미리 집 열쇠를 건넸다는 주인의 말에 따라 해당 월세방에 대한 감식을 진행했다. 월세방 화장실에선 피해자의 혈흔이 가득 나왔다. 유력 용의자가 특정되자 즉각 검거에 나섰고 당일 오후 11시30분께 월세방에서 멀지 않은 한 모텔에서 검거했다.불법체류자였던 당서 55세 중국 동포 박춘풍이었다. 위조여권을 사용하다 적발돼 2003년 중국으로 추방됐던 박춘풍은 2008년 12월 위조여권을 이용해 한국으로 입국한 상태였다. 박춘풍을 검거 직후 경찰조사에서 실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위조여권 속 신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범행에 대해선 묵비권을 행사했다.이어진 조사에서도 박춘풍은 혐의를 부인했다. 박춘풍은 “A씨와 동거를 했던 것은 맞지만 이미 헤어진 사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이 증거를 제시하며 계속 추궁하자 13일 새벽 결국 범행을 시인하고 추가 시신 유기 장소를 진술했다.경찰 조사 결과, 그해 4월부터 A씨와 동거한 박춘풍은 피해자에게 수시로 폭력을 가했다. 계속된 폭력에 피해자는 결국 11 월초 자신의 언니 집으로 피신했다. 피해자가 재결합을 거부하자 박춘풍은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후 곧바로 살해했다. 그리고 수일에 걸쳐 집과 새로 계약한 월세방에서 피해자 시신을 훼손한 후 이를 여러 장소에 유기했다. 또 피해자 휴대전화를 이용해 생존해 있는 듯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박춘풍은 잔혹한 범행 후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보냈다. 체포 후에도 박춘풍은 “죽인 건 맞지만 우발적 범행이었다. 왜 믿지 않느냐”며 “살인이 아닌 폭행치사죄”라는 식의 황당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법원은 이 같은 주장을 일축했다. 1심은 “범행이 매우 잔인하고 피해자 인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찾아볼 수 없는데도, 변명으로 일관하고 반성하는 기색을 안 보이며 죄의식이 결여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박춘풍이 상소했지만 형은 2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한광범 기자 2022.12.04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4년 12월 4일 오후 1시 무렵.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등산로에서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됐다.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시신은 한 등산객에 의해 발견됐다. 신체 일부만 발견된 시신은 잔혹하게 토막 난 상태였다. 경찰은 시신을 국립수사과학연구원에 보내 부검을 의뢰하는 한편 추가 시신을 찾기 위해 인근을 수색했다.추가 시신 발견과 피해자 신원 특정에 애를 먹던 경찰은 시민들의 제보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한 중국 동포 여성이 같은 달 8일 “지난달 26일부터 여동생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같은 달 8일 늦은 밤 가출신고를 한 것이다. 경찰은 신고한 여성의 DNA를 채취해 국과수에 보냈다. 국과수는 해당 여성 A씨의 DNA를 통해 시신의 신원을 특정했다.동거녀 살인범 ‘박춘풍’. (사진=연합뉴스)같은 달 11일 오전 경찰은 수원천에서 시신이 담긴 비닐봉지들을 추가로 발견했다. 그리고 당일 한 시민이 “월세방을 계약한 중국 동포 남성이 입주시기가 지났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해당 월세방의 위치는 시신들이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경찰은 해당 남성에게 미리 집 열쇠를 건넸다는 주인의 말에 따라 해당 월세방에 대한 감식을 진행했다. 월세방 화장실에선 피해자의 혈흔이 가득 나왔다. 유력 용의자가 특정되자 즉각 검거에 나섰고 당일 오후 11시30분께 월세방에서 멀지 않은 한 모텔에서 검거했다.불법체류자였던 당서 55세 중국 동포 박춘풍이었다. 위조여권을 사용하다 적발돼 2003년 중국으로 추방됐던 박춘풍은 2008년 12월 위조여권을 이용해 한국으로 입국한 상태였다. 박춘풍을 검거 직후 경찰조사에서 실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위조여권 속 신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범행에 대해선 묵비권을 행사했다.이어진 조사에서도 박춘풍은 혐의를 부인했다. 박춘풍은 “A씨와 동거를 했던 것은 맞지만 이미 헤어진 사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이 증거를 제시하며 계속 추궁하자 13일 새벽 결국 범행을 시인하고 추가 시신 유기 장소를 진술했다.경찰 조사 결과, 그해 4월부터 A씨와 동거한 박춘풍은 피해자에게 수시로 폭력을 가했다. 계속된 폭력에 피해자는 결국 11 월초 자신의 언니 집으로 피신했다. 피해자가 재결합을 거부하자 박춘풍은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후 곧바로 살해했다. 그리고 수일에 걸쳐 집과 새로 계약한 월세방에서 피해자 시신을 훼손한 후 이를 여러 장소에 유기했다. 또 피해자 휴대전화를 이용해 생존해 있는 듯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박춘풍은 잔혹한 범행 후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보냈다. 체포 후에도 박춘풍은 “죽인 건 맞지만 우발적 범행이었다. 왜 믿지 않느냐”며 “살인이 아닌 폭행치사죄”라는 식의 황당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법원은 이 같은 주장을 일축했다. 1심은 “범행이 매우 잔인하고 피해자 인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찾아볼 수 없는데도, 변명으로 일관하고 반성하는 기색을 안 보이며 죄의식이 결여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박춘풍이 상소했지만 형은 2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 국가부도의 날..고통의 IMF 시작[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시작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는 환율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외국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해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린 것도 영향을 미쳤다. 외환위기 여파는 도미노처럼 한국으로 밀려왔다. 한국의 외화 보유액은 바닥을 보이기 직전이었다. 국가 신용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국제신용평가사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줄줄이 내려 잡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본 외국자본은 빚을 갚으라고 더 채근했다. 그런데 갚을 수가 없었다. 달러가 부족했다.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상당수 주요 기업은 차입 경영으로 회사를 일궈왔다. 외국 자본이 이탈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렸고, 빚을 갚지 못하는 기업이 속출했다. 재계 14위의 한보그룹 부도(1997년 1월)가 그 시작이었다. 이후로 삼미그룹(3월), 진로그룹(4월), 삼립식품·한신공영그룹(5월), 쌍방울그룹(10월), 해태그룹·뉴코아그룹(11월)이 차례로 부도를 맞았다. 10대 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계 순위 8위의 기아그룹도 그해 7월 부도를 맞았다. 대우그룹은 쌍용차를 인수(12월)했으나 이 여파로 1999년 11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하반기 들어서면서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지수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화폐가치와 신용도 하락에 따른 여파였다. 앞서 외환위기를 맞은 태국과 인니가 겪은 현상이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는 보고서(10월)를 냈다. 정부는 미국 등 주변국에 차관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제 신평사는 한국 신용등급을 또다시 하향 조정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11월21일 IMF 구제금융을 공식 확인했고, 이튿날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고 모두의 고통 분담을 호소했다.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부터)와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정부청사에서 구제금융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1997년 12월3일, 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서울 정부중앙청사에서 만나 차관 제공 업무협약에 서명했다. IMF가 한국에 555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한 내용이 담겼다. 이에 앞서 금융사에 대한 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기업 회계 투명성 확보 등을 골자로 양측이 합의한 데 따라 이러한 서명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날을 IMF 체제가 공식적으로 시작한 시점으로 본다.우선 부실 금융사에 대한 대대적으로 정리가 이뤄졌다. 동서증권과 5개 종금사는 영업정지를 당했다. 상업은행(우리은행의 전신)은 한일은행을, 하나은행은 보람은행을, 국민은행은 장기신용은행을, 조흥은행(신한은행의 전신)이 강원은행을 차례로 합병했다. 제일은행은 외국자본에 팔렸다.그럼에도 한국 경제는 쉬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환율은 최고치를, 주가는 최저치를 각각 연일 경신했다. 그해 12월 고려증권과 한라그룹, 영진약품, 경남모직, 동양어패럴, 삼성제약, 청구그룹이 연쇄 부도를 맞았다. 실직이 늘어나 실업률이 산업화 이후 최고치까지 치솟았다. 임금 체불이 늘어 직장인이 있다고 해서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1998년 초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금.(사진=연합뉴스)그러자 전국에서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다. 1998년 1~4월 모인 금의 양은 225t 가량이었다. 현재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이 100여t인 점과 비교하면 놀라운 규모였다. 투자로 사뒀던 금괴부터 장롱에 있던 돌 반지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를 수출해 확보한 외화로 급한 불을 껐다. 훗날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금을 담보로 외화를 확보하지 않고 수출한 점과 물량이 대거 쏟아져 금값이 하락해 제값을 받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아쉬운 대목이다.한국은 2001년 8월23일 IMF에 빌린 돈을 전부 갚았다. 애초 예정한 기한을 3년이나 앞당겼다. 국민의 고통분담과 기업의 체질 개선, 정부의 외화 관리 노력이 뒤따른 결과로 평가된다. IMF 이전 300억 달러이던 외환보유액은 현재(10월 기준) 4140억 달러로 늘었다. 다만 이후 굳어진 양극화와 고용불안 등 후유증은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전재욱 기자 2022.12.03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시작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는 환율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외국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해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린 것도 영향을 미쳤다. 외환위기 여파는 도미노처럼 한국으로 밀려왔다. 한국의 외화 보유액은 바닥을 보이기 직전이었다. 국가 신용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국제신용평가사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줄줄이 내려 잡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본 외국자본은 빚을 갚으라고 더 채근했다. 그런데 갚을 수가 없었다. 달러가 부족했다.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상당수 주요 기업은 차입 경영으로 회사를 일궈왔다. 외국 자본이 이탈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렸고, 빚을 갚지 못하는 기업이 속출했다. 재계 14위의 한보그룹 부도(1997년 1월)가 그 시작이었다. 이후로 삼미그룹(3월), 진로그룹(4월), 삼립식품·한신공영그룹(5월), 쌍방울그룹(10월), 해태그룹·뉴코아그룹(11월)이 차례로 부도를 맞았다. 10대 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계 순위 8위의 기아그룹도 그해 7월 부도를 맞았다. 대우그룹은 쌍용차를 인수(12월)했으나 이 여파로 1999년 11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하반기 들어서면서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지수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화폐가치와 신용도 하락에 따른 여파였다. 앞서 외환위기를 맞은 태국과 인니가 겪은 현상이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는 보고서(10월)를 냈다. 정부는 미국 등 주변국에 차관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제 신평사는 한국 신용등급을 또다시 하향 조정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11월21일 IMF 구제금융을 공식 확인했고, 이튿날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고 모두의 고통 분담을 호소했다.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부터)와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정부청사에서 구제금융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1997년 12월3일, 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서울 정부중앙청사에서 만나 차관 제공 업무협약에 서명했다. IMF가 한국에 555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한 내용이 담겼다. 이에 앞서 금융사에 대한 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기업 회계 투명성 확보 등을 골자로 양측이 합의한 데 따라 이러한 서명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날을 IMF 체제가 공식적으로 시작한 시점으로 본다.우선 부실 금융사에 대한 대대적으로 정리가 이뤄졌다. 동서증권과 5개 종금사는 영업정지를 당했다. 상업은행(우리은행의 전신)은 한일은행을, 하나은행은 보람은행을, 국민은행은 장기신용은행을, 조흥은행(신한은행의 전신)이 강원은행을 차례로 합병했다. 제일은행은 외국자본에 팔렸다.그럼에도 한국 경제는 쉬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환율은 최고치를, 주가는 최저치를 각각 연일 경신했다. 그해 12월 고려증권과 한라그룹, 영진약품, 경남모직, 동양어패럴, 삼성제약, 청구그룹이 연쇄 부도를 맞았다. 실직이 늘어나 실업률이 산업화 이후 최고치까지 치솟았다. 임금 체불이 늘어 직장인이 있다고 해서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1998년 초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금.(사진=연합뉴스)그러자 전국에서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다. 1998년 1~4월 모인 금의 양은 225t 가량이었다. 현재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이 100여t인 점과 비교하면 놀라운 규모였다. 투자로 사뒀던 금괴부터 장롱에 있던 돌 반지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를 수출해 확보한 외화로 급한 불을 껐다. 훗날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금을 담보로 외화를 확보하지 않고 수출한 점과 물량이 대거 쏟아져 금값이 하락해 제값을 받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아쉬운 대목이다.한국은 2001년 8월23일 IMF에 빌린 돈을 전부 갚았다. 애초 예정한 기한을 3년이나 앞당겼다. 국민의 고통분담과 기업의 체질 개선, 정부의 외화 관리 노력이 뒤따른 결과로 평가된다. IMF 이전 300억 달러이던 외환보유액은 현재(10월 기준) 4140억 달러로 늘었다. 다만 이후 굳어진 양극화와 고용불안 등 후유증은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 "죽어도 어쩔 수 없다"…피아니스트의 前남편 납치 사주[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4년 12월 2일. 수원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일당 3명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여성 이모씨(당시 41세)의 의뢰를 받아 이씨 전 남편 채모씨(사망 당시 40세)를 납치해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당시 오케스트라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던 피아니스트 이씨는 도대체 왜 공연예술가였던 전 남편에 대한 납치를 사주했던 걸까?공연예술가 남편에 대한 납치·강도 등을 사주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이 확정된 피아니스트 이모씨.사건의 시작은 잘못된 결혼이었다. 과거 외국에서 결혼해 초등학생 자녀까지 뒀던 이씨는 이를 숨긴 채 한 살 어린 채씨에게 접근해 2010년 10월 결혼식을 올렸다. 채씨가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경제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끈질긴 구애를 보낸 결과였다. 채씨는 결혼 선물로 서울 서초동에 자신의 명의로 프랜차이즈 카페를 차려줄 만큼 이씨를 진심으로 다했다. 하지만 외국에 있는 자녀 양육비로 매달 수백만원을 송금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던 이씨는 결혼 직후부터 이 카페 자금에 몰래 손을 대기 시작했다.결혼생활은 결국 불과 4개월 만에 파탄났다. 이씨는 결혼 초기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그 기간 동안 이씨는 다른 남자들과 만나 외도를 하며 임신·낙태까지 했다. 낙태 후에는 채씨의 아이를 유산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채씨가 다른 남성이 함께 있는 이씨 모습을 발견하며 감춰졌던 이씨의 이중생활 실체가 드러났다. 이씨와 함께 있던 내연 남성은 따지는 채씨에게 오히려 “내가 남편인데 당신이야말로 누구냐”고 화를 냈다. 실제 해당 남성은 집안에 이씨를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까지 한 상태였다. 그렇게 채씨는 뒤늦게 이씨가 수많은 남자를 만나며 복잡한 사생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은밀한 사생활 발각되자…위해 가하기로 결심이씨와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기로 한 채씨는 결혼 전력 등을 속였던 것 등을 포함해 이씨에게 거짓말, 외도, 자금유용 등에 대한 피해 보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결국 이씨는 2012년 12월 채씨에게‘사실혼 부당파기 위자료 지급 확인서’를 써줬다. 매달 70만원씩 총 7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이씨는 위자료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한편, 자신의 사생활이 채씨에 의해 음악계에 알려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채씨가 2013년 9월 이씨 가족들에게 “왜 결혼할 때 이씨 과거에 대해 알리지 않았냐”고 따진 것을 알게 됐고, 자신의 사생활이 가족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이씨에게 위해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피아니스트 이모씨가 난잡한 사생활이 들통나 남편 채모씨에게 써준 위자료 지급합의서. (사진=JTBC 갈무리)그는 같은 해 11월 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심부름센터 직원 A씨를 만났다. 이씨는 A씨에게 “사실혼 배우자였던 채씨에게 겁을 주고 내가 손해 본 만큼 재산을 빼앗아 그걸 심부름 보수로 충당하라”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퍽치기를 하거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갖게 한 후 강간으로 고소하는 등으로 채씨를 혼내줄 방법이 있느냐”며 “사람을 때리려면 사람을 가둬야 되지 않는냐”며 구체적 방법까지 제안했다.A씨는 며칠 후 이씨에게 전화해 “단순 퍽치기는 1000만원, 납치까지 하면 1500만원”이라고 구체적인 액수를 제시한 후, 승낙을 받았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던 이씨는 이 비용마저도 채씨에게서 빼앗도록 했다. 이를 위해 A씨에게 채씨 재산내역을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A씨가 “착수금을 스스로 충당한 후 피해자로부터 돈을 빼앗아 갖겠다”고 제의하자 이씨는 “빼앗은 돈은 다 가져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실명 만들어달라”·“죽어도 어쩔 수 없다”이씨는 이후 A씨를 만난 자리에서 “채씨를 실명하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A씨는 여기에 “그 정도로 다치게 하려면 죽이는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다”고 답했다. A씨가 수차례 “채씨를 죽일 수도 있다”고 밝혔고, 이씨는 “그런 상황은 원하지 않지만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사실상 이를 용인했다.이를 계기로 범행은 더 구체화됐다. 이씨는 범행 준비 비용에 쓰라며 A씨에게 200만원가량을 지급했고 A씨는 범행에 동참할 공범들과 범행 도구들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A씨가 구체적 살인계획까지 마련하자, 겁에 질린 A씨 일당 중 일부는 범행 가담을 회피하려 잠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씨는 오히려 A씨 일당이 채씨를 쉽게 유인·납치할 수 있도록 구체적 범행 시나리오까지 제공했다. A씨 일당은 시나리오에 따라 2014년 1월 4일 채씨를 유인해 자신들의 차량에 태우는 데 성공했다. 채씨가 차량에 탑승한 직후 A씨 등은 흉기를 꺼내 보이며 “여자한테 잘못한 것 있지요?”라고 말한 후 결박했다. 이들은 미리 물색해 놓은 경북 안동의 한 빈집으로 가기 위해 채씨를 태운채 고속도로로 이동했다. 그리고 용인휴게소에서 정차한 사이, 채씨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차 밖으로 탈출했다. A씨 일당은 곧바로 채씨를 차량에 다시 강제로 태우려 했고, 이 과정에서 채씨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채씨가 차량에 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차량 안에 있던 A씨는 흉기를 꺼내 채씨 하체를 수차례 찔렀다. 흉기에 찔린 채씨는 차량에 강제로 태워졌고 A씨 일당은 차량을 다시 출발시켰다. 다량의 피를 흘리는 채씨가 차에서 살려달라고 호소했지만 A씨 일당은 이를 무시했다.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곧바로 A씨 일당이 탄 차량 추적에 나섰고 이들은 30여분 만에 강원도 원주 고속도로에서 검거됐다. 경찰이 A씨 일당을 검거했을 당시 채씨는 이미 과다출혈로 사망한 상태였다. 공연감독 채모씨를 살해한 A씨 일당이 2014년 1월 9일 용인휴게소에서 진행된 현장검증에서 범행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뉴스1)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A씨 일당으로부터 “이씨 사주를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해 곧바로 이씨를 강도살인 공범으로 체포했다. 하지만 이씨는 “A씨에게 제가 의뢰한 것을 숨기고 그저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겁만 주라고 했다”며 “강도 범행을 공모하지도 않았고 사망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A씨 일당을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하는 한편, 이씨에 대해선 살인 공모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강도살인이 아닌 강도치사 혐의만을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아내 “죽일줄 몰랐다”→공범 “모두 알렸다”이씨는 법정에서도 수사기관에서와 같이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사람을 죽여달라고 심부름센터에 의뢰를 했겠나. 200만원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겁을 주는 게 최대한이라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범인 A씨가 법정에서 “이씨에게 세세한 얘기까지 다 했다. 이씨가 납치를 주장했고 구체적 납치 계획까지 알려줬다. 연장을 챙기는 얘기까지 이씨에게 전했다”고 증언하며 이씨 주장을 직접 반박했다.1심은 “이씨가 피해자에게 원한을 품고 심부름센터에 연락해 강하게 폭행·협박하고 금품을 강취해 달라는 의뢰를 한 후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고, 결국 피해자는 A씨 일당에게 무참히 살해됐다”며 이씨의 강도치사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겐 징역 25년, 범행에 동참한 일당 2명에겐 각각 징역 13년과 10년을 선고했다.이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그는 “강도 범행을 공모하지 않았고 채씨 사망도 전혀 예견할 수 없었다”고 재차 주장했다. 하지만 2심은 “객관적으로 범행이 인정되는 상황에서도 이를 극구 부인하며 죄를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며 “”피해자 사망에 가장 근원적 책임을 져야 할 이씨에 대한 1심 형이 너무 가볍다“며 징역 13년으로 형을 올렸다. A씨 등의 항소는 모두 기각했다.특히 2심은 이씨에 대해 강도살인이 아닌 강도치사를 적용해 기소한 검찰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2심은 ”여러 의심스러운 정황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죽음을 용인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범들과 달리 강도치사죄로 기소됐다“고 지적한 것. 이씨와 A씨가 모두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 기각돼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한광범 기자 2022.12.02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4년 12월 2일. 수원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일당 3명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여성 이모씨(당시 41세)의 의뢰를 받아 이씨 전 남편 채모씨(사망 당시 40세)를 납치해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당시 오케스트라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던 피아니스트 이씨는 도대체 왜 공연예술가였던 전 남편에 대한 납치를 사주했던 걸까?공연예술가 남편에 대한 납치·강도 등을 사주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이 확정된 피아니스트 이모씨.사건의 시작은 잘못된 결혼이었다. 과거 외국에서 결혼해 초등학생 자녀까지 뒀던 이씨는 이를 숨긴 채 한 살 어린 채씨에게 접근해 2010년 10월 결혼식을 올렸다. 채씨가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경제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끈질긴 구애를 보낸 결과였다. 채씨는 결혼 선물로 서울 서초동에 자신의 명의로 프랜차이즈 카페를 차려줄 만큼 이씨를 진심으로 다했다. 하지만 외국에 있는 자녀 양육비로 매달 수백만원을 송금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던 이씨는 결혼 직후부터 이 카페 자금에 몰래 손을 대기 시작했다.결혼생활은 결국 불과 4개월 만에 파탄났다. 이씨는 결혼 초기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그 기간 동안 이씨는 다른 남자들과 만나 외도를 하며 임신·낙태까지 했다. 낙태 후에는 채씨의 아이를 유산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채씨가 다른 남성이 함께 있는 이씨 모습을 발견하며 감춰졌던 이씨의 이중생활 실체가 드러났다. 이씨와 함께 있던 내연 남성은 따지는 채씨에게 오히려 “내가 남편인데 당신이야말로 누구냐”고 화를 냈다. 실제 해당 남성은 집안에 이씨를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까지 한 상태였다. 그렇게 채씨는 뒤늦게 이씨가 수많은 남자를 만나며 복잡한 사생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은밀한 사생활 발각되자…위해 가하기로 결심이씨와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기로 한 채씨는 결혼 전력 등을 속였던 것 등을 포함해 이씨에게 거짓말, 외도, 자금유용 등에 대한 피해 보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결국 이씨는 2012년 12월 채씨에게‘사실혼 부당파기 위자료 지급 확인서’를 써줬다. 매달 70만원씩 총 7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이씨는 위자료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한편, 자신의 사생활이 채씨에 의해 음악계에 알려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채씨가 2013년 9월 이씨 가족들에게 “왜 결혼할 때 이씨 과거에 대해 알리지 않았냐”고 따진 것을 알게 됐고, 자신의 사생활이 가족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이씨에게 위해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피아니스트 이모씨가 난잡한 사생활이 들통나 남편 채모씨에게 써준 위자료 지급합의서. (사진=JTBC 갈무리)그는 같은 해 11월 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심부름센터 직원 A씨를 만났다. 이씨는 A씨에게 “사실혼 배우자였던 채씨에게 겁을 주고 내가 손해 본 만큼 재산을 빼앗아 그걸 심부름 보수로 충당하라”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퍽치기를 하거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갖게 한 후 강간으로 고소하는 등으로 채씨를 혼내줄 방법이 있느냐”며 “사람을 때리려면 사람을 가둬야 되지 않는냐”며 구체적 방법까지 제안했다.A씨는 며칠 후 이씨에게 전화해 “단순 퍽치기는 1000만원, 납치까지 하면 1500만원”이라고 구체적인 액수를 제시한 후, 승낙을 받았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던 이씨는 이 비용마저도 채씨에게서 빼앗도록 했다. 이를 위해 A씨에게 채씨 재산내역을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A씨가 “착수금을 스스로 충당한 후 피해자로부터 돈을 빼앗아 갖겠다”고 제의하자 이씨는 “빼앗은 돈은 다 가져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실명 만들어달라”·“죽어도 어쩔 수 없다”이씨는 이후 A씨를 만난 자리에서 “채씨를 실명하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A씨는 여기에 “그 정도로 다치게 하려면 죽이는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다”고 답했다. A씨가 수차례 “채씨를 죽일 수도 있다”고 밝혔고, 이씨는 “그런 상황은 원하지 않지만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사실상 이를 용인했다.이를 계기로 범행은 더 구체화됐다. 이씨는 범행 준비 비용에 쓰라며 A씨에게 200만원가량을 지급했고 A씨는 범행에 동참할 공범들과 범행 도구들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A씨가 구체적 살인계획까지 마련하자, 겁에 질린 A씨 일당 중 일부는 범행 가담을 회피하려 잠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씨는 오히려 A씨 일당이 채씨를 쉽게 유인·납치할 수 있도록 구체적 범행 시나리오까지 제공했다. A씨 일당은 시나리오에 따라 2014년 1월 4일 채씨를 유인해 자신들의 차량에 태우는 데 성공했다. 채씨가 차량에 탑승한 직후 A씨 등은 흉기를 꺼내 보이며 “여자한테 잘못한 것 있지요?”라고 말한 후 결박했다. 이들은 미리 물색해 놓은 경북 안동의 한 빈집으로 가기 위해 채씨를 태운채 고속도로로 이동했다. 그리고 용인휴게소에서 정차한 사이, 채씨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차 밖으로 탈출했다. A씨 일당은 곧바로 채씨를 차량에 다시 강제로 태우려 했고, 이 과정에서 채씨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채씨가 차량에 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차량 안에 있던 A씨는 흉기를 꺼내 채씨 하체를 수차례 찔렀다. 흉기에 찔린 채씨는 차량에 강제로 태워졌고 A씨 일당은 차량을 다시 출발시켰다. 다량의 피를 흘리는 채씨가 차에서 살려달라고 호소했지만 A씨 일당은 이를 무시했다.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곧바로 A씨 일당이 탄 차량 추적에 나섰고 이들은 30여분 만에 강원도 원주 고속도로에서 검거됐다. 경찰이 A씨 일당을 검거했을 당시 채씨는 이미 과다출혈로 사망한 상태였다. 공연감독 채모씨를 살해한 A씨 일당이 2014년 1월 9일 용인휴게소에서 진행된 현장검증에서 범행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뉴스1)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A씨 일당으로부터 “이씨 사주를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해 곧바로 이씨를 강도살인 공범으로 체포했다. 하지만 이씨는 “A씨에게 제가 의뢰한 것을 숨기고 그저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겁만 주라고 했다”며 “강도 범행을 공모하지도 않았고 사망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A씨 일당을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하는 한편, 이씨에 대해선 살인 공모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강도살인이 아닌 강도치사 혐의만을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아내 “죽일줄 몰랐다”→공범 “모두 알렸다”이씨는 법정에서도 수사기관에서와 같이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사람을 죽여달라고 심부름센터에 의뢰를 했겠나. 200만원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겁을 주는 게 최대한이라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범인 A씨가 법정에서 “이씨에게 세세한 얘기까지 다 했다. 이씨가 납치를 주장했고 구체적 납치 계획까지 알려줬다. 연장을 챙기는 얘기까지 이씨에게 전했다”고 증언하며 이씨 주장을 직접 반박했다.1심은 “이씨가 피해자에게 원한을 품고 심부름센터에 연락해 강하게 폭행·협박하고 금품을 강취해 달라는 의뢰를 한 후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고, 결국 피해자는 A씨 일당에게 무참히 살해됐다”며 이씨의 강도치사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겐 징역 25년, 범행에 동참한 일당 2명에겐 각각 징역 13년과 10년을 선고했다.이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그는 “강도 범행을 공모하지 않았고 채씨 사망도 전혀 예견할 수 없었다”고 재차 주장했다. 하지만 2심은 “객관적으로 범행이 인정되는 상황에서도 이를 극구 부인하며 죄를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며 “”피해자 사망에 가장 근원적 책임을 져야 할 이씨에 대한 1심 형이 너무 가볍다“며 징역 13년으로 형을 올렸다. A씨 등의 항소는 모두 기각했다.특히 2심은 이씨에 대해 강도살인이 아닌 강도치사를 적용해 기소한 검찰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2심은 ”여러 의심스러운 정황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죽음을 용인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범들과 달리 강도치사죄로 기소됐다“고 지적한 것. 이씨와 A씨가 모두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 기각돼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 친절하던 두 아이의 아빠…13년 전 연쇄살인마였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11월 21일 늦은 밤. 대구의 한 길거리에서 20대 여성 A씨가 강도상해 범행을 당했다. 귀가 중이던 A씨는 모르는 휴대전화를 보고 길을 걷던 중 모르는 한 거구의 남성이 휘두른 둔기에 머리를 기습적으로 가격 당했다.여성은 자신의 가방 등을 훔쳐가려던 남성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범인은 둔기로 A씨 머리를 수십 차례 내리쳤다. 멀리서 범행 현장을 목격한 행인이 뛰어 달려오자 범인은 도주했다. 중상을 당한 A씨 곧바로 병원에 실려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다. 범행 현장 인근의 CCTV 속에는 범행 전 범행대상을 물색하던 범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경찰은 CCTV 속에서 범인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확인하고 현장에서 담배꽁초를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했다.CCTV 영상을 토대로 경찰은 같은 달 28일 범인을 검거했다. 대구에 사는 당시 48세 남성 이모씨였다. 아내와 중고교생인 두 자녀를 두고 있던 평범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경찰에 붙잡힌 이씨는 초기 조사에선 “기억나지 않는다”며 잡아뗐다. 추가 조사에서 경찰이 범행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제시한 후에야 범행을 자백했다.◇강도상해로 검거 후 13년전 살인범행 드러나강도상해 범인 검거로 끝날 것 같았던 사건은 그 직후 국과수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DNA 분석 결과가 통보되며 양상이 달라졌다. 국과수는 이씨 DNA가 2004년 6월 대구에서 발생한 노래방 여주인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를 통보했다. 13년 넘게 미제로 남았던 대구 노래방 여주인 살인사건 현장에선 범인의 피부조직 일부와 범인이 버린 담배꽁초가 발견된 상황이었다. 경찰 수사팀엔 피살된 노래방 여주인의 아들이 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경찰은 유족인 해당 형사를 일단 수사팀에서 빼는 한편, 미제사건팀 등으로 인원을 보강해 수사팀을 대폭 확대했다. 이씨도 DNA 증거 앞에 결국 여주인 B씨 살해 사실을 자백했다. 경찰은 12월 1일 13년 전 미제사건 범인 검거 소식을 발표했다.조사 결과 이씨는 2004년 6월 자신이 운영하던 술집에서 멀지 않은 노래방에서 여주인을 강간하려다 살인했다. 그는 이미 기절한 피해자가 신고할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피해자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살해 후에는 피해자 시신을 엽기적으로 훼손하기까지 했다.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가 발견됐지만 지문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장기 미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이씨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경찰은 2009년 발생한 또 다른 미제 살인사건과 이씨 범행수법이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2009년 2월 대구 수성구에서 한 노래방 업주 C씨가 숨진 채로 발견됐는데, C씨 역시 B씨와 비슷한 수법으로 잔혹하게 살해됐다. 범행수법의 유사성을 근거로 경찰은 이씨에게 범행에 대해 추궁했다. 하지만 이씨는 범행을 부인했다. 그는 경찰 조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자해를 하기도 했다. 자해로 부상을 입은 이씨에게 경찰은 “다 털고 가자”고 설득했고, 이씨는 결국 C씨 살해 사실도 자백했다.대구 노래방 여주인 연쇄살인범 이모씨를 수사한 경찰 수사팀엔 첫번째 살인 피해자의 아들이 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13년 전 피살된 모친의 살인범을 형사가 된 아들이 자기 손으로 붙잡았다.(사진=연합뉴스)조사 결과 과거 노래방을 운영한 경험이 있던 노래방 업주 모임에서 본 적이 있던 C씨를 이듬해 2월 찾아가 강간을 시도하다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씨는 두 번째 살인 사건 현장엔 첫번째 범행과 달리 지문 등 어떠한 범행 흔적도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가족들 “그럴 사람 아니다…믿을 수 없다”두 건의 끔찍한 연쇄 살인 범죄를 저질렀지만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살인마 실체를 숨기고 ‘평범한 가장’이라는 가면을 철저히 썼기에 가족들 모두 속아 넘어갔다.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가족들은 ‘이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이씨 아내는 경찰 조사에서 “싸움도 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니다. 평소에 여자들을 특히 더 조심히 대한다”며 “범행을 저질렀다는 걸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씨 친동생 역시 “이씨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평소 말수가 거의 없다. 감정 표현도 없이 많이 참고 억누르는 성격”이라고 밝혔다.하지만 수사 당시 진행한 정신분석 결과에서 이씨는 ‘여성이 친근감 있게 남자를 대하는 것은 성적 접촉을 허용하는 것’ 등 강간에 대한 그릇된 성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경찰은 이씨 차량에선 콘돔과 전기충격기 등 성범죄 등에 사용할 법한 물건들이 다수 발견됐다. 사이코패스로 판명되진 않았지만 이씨는 피해자들이 받은 피해에 대해 철저히 무관하고 큰 죄책감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피해자 시신을 훼손한 후 일부를 가지고 가거나, 살인 범행 직후 자신의 가게로 가 범행 당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장사를 하기도 했다.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던 이씨는 어린 시절부터 변태적 성향을 보였다. 20대이던 1996년 3월 길거리에서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을 시도하다 붙잡혀 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전과도 있었다.◇검찰 “사형 선고해달라”→법원, 무기징역 선고강간치상 전과를 숨기고 1999년 7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이듬해 자녀까지 출산했다. 그리고 첫 번째 살인 범행 직후인 2005년엔 둘째 자녀까지 낳으며 보통의 아버지 모습을 하며 생활을 했고, 2009년 또다시 범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용의 선상에조차 오르지 않고 수사망을 피하며 거리를 수년간 활보했다.검찰은 강간살인 등의 혐의로 A씨를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피해자들을 물욕과 성욕 대상으로 삼아 잔인하고 극악한 범행을 연쇄적으로 저질렀다. 반성은커녕 범행을 은폐·축소하려 하고 있어 일말의 교화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다”며 사형을 구형했다.1심은 “잔혹한 범행으로 처참하게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죽는 순간까지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고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며 “범죄에 상응하는 응분의 형벌에 처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검찰의 사형 선고 구형에 대해선 “사형 선택을 고려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생명을 박탈하기보다는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된 상태에서 잘못을 진정으로 참회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이씨는 1심 판결에 대해 “형량이 과도하다”며 항소했다. 하지만 2심도 “1심이 선고한 무기징역형은 이씨의 죄책에 상응하는 적정한 형벌인 것으로 보인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이씨가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한광범 기자 2022.12.01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11월 21일 늦은 밤. 대구의 한 길거리에서 20대 여성 A씨가 강도상해 범행을 당했다. 귀가 중이던 A씨는 모르는 휴대전화를 보고 길을 걷던 중 모르는 한 거구의 남성이 휘두른 둔기에 머리를 기습적으로 가격 당했다.여성은 자신의 가방 등을 훔쳐가려던 남성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범인은 둔기로 A씨 머리를 수십 차례 내리쳤다. 멀리서 범행 현장을 목격한 행인이 뛰어 달려오자 범인은 도주했다. 중상을 당한 A씨 곧바로 병원에 실려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다. 범행 현장 인근의 CCTV 속에는 범행 전 범행대상을 물색하던 범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경찰은 CCTV 속에서 범인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확인하고 현장에서 담배꽁초를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했다.CCTV 영상을 토대로 경찰은 같은 달 28일 범인을 검거했다. 대구에 사는 당시 48세 남성 이모씨였다. 아내와 중고교생인 두 자녀를 두고 있던 평범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경찰에 붙잡힌 이씨는 초기 조사에선 “기억나지 않는다”며 잡아뗐다. 추가 조사에서 경찰이 범행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제시한 후에야 범행을 자백했다.◇강도상해로 검거 후 13년전 살인범행 드러나강도상해 범인 검거로 끝날 것 같았던 사건은 그 직후 국과수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DNA 분석 결과가 통보되며 양상이 달라졌다. 국과수는 이씨 DNA가 2004년 6월 대구에서 발생한 노래방 여주인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를 통보했다. 13년 넘게 미제로 남았던 대구 노래방 여주인 살인사건 현장에선 범인의 피부조직 일부와 범인이 버린 담배꽁초가 발견된 상황이었다. 경찰 수사팀엔 피살된 노래방 여주인의 아들이 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경찰은 유족인 해당 형사를 일단 수사팀에서 빼는 한편, 미제사건팀 등으로 인원을 보강해 수사팀을 대폭 확대했다. 이씨도 DNA 증거 앞에 결국 여주인 B씨 살해 사실을 자백했다. 경찰은 12월 1일 13년 전 미제사건 범인 검거 소식을 발표했다.조사 결과 이씨는 2004년 6월 자신이 운영하던 술집에서 멀지 않은 노래방에서 여주인을 강간하려다 살인했다. 그는 이미 기절한 피해자가 신고할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피해자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살해 후에는 피해자 시신을 엽기적으로 훼손하기까지 했다.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가 발견됐지만 지문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장기 미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이씨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경찰은 2009년 발생한 또 다른 미제 살인사건과 이씨 범행수법이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2009년 2월 대구 수성구에서 한 노래방 업주 C씨가 숨진 채로 발견됐는데, C씨 역시 B씨와 비슷한 수법으로 잔혹하게 살해됐다. 범행수법의 유사성을 근거로 경찰은 이씨에게 범행에 대해 추궁했다. 하지만 이씨는 범행을 부인했다. 그는 경찰 조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자해를 하기도 했다. 자해로 부상을 입은 이씨에게 경찰은 “다 털고 가자”고 설득했고, 이씨는 결국 C씨 살해 사실도 자백했다.대구 노래방 여주인 연쇄살인범 이모씨를 수사한 경찰 수사팀엔 첫번째 살인 피해자의 아들이 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13년 전 피살된 모친의 살인범을 형사가 된 아들이 자기 손으로 붙잡았다.(사진=연합뉴스)조사 결과 과거 노래방을 운영한 경험이 있던 노래방 업주 모임에서 본 적이 있던 C씨를 이듬해 2월 찾아가 강간을 시도하다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씨는 두 번째 살인 사건 현장엔 첫번째 범행과 달리 지문 등 어떠한 범행 흔적도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가족들 “그럴 사람 아니다…믿을 수 없다”두 건의 끔찍한 연쇄 살인 범죄를 저질렀지만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살인마 실체를 숨기고 ‘평범한 가장’이라는 가면을 철저히 썼기에 가족들 모두 속아 넘어갔다.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가족들은 ‘이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이씨 아내는 경찰 조사에서 “싸움도 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니다. 평소에 여자들을 특히 더 조심히 대한다”며 “범행을 저질렀다는 걸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씨 친동생 역시 “이씨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평소 말수가 거의 없다. 감정 표현도 없이 많이 참고 억누르는 성격”이라고 밝혔다.하지만 수사 당시 진행한 정신분석 결과에서 이씨는 ‘여성이 친근감 있게 남자를 대하는 것은 성적 접촉을 허용하는 것’ 등 강간에 대한 그릇된 성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경찰은 이씨 차량에선 콘돔과 전기충격기 등 성범죄 등에 사용할 법한 물건들이 다수 발견됐다. 사이코패스로 판명되진 않았지만 이씨는 피해자들이 받은 피해에 대해 철저히 무관하고 큰 죄책감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피해자 시신을 훼손한 후 일부를 가지고 가거나, 살인 범행 직후 자신의 가게로 가 범행 당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장사를 하기도 했다.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던 이씨는 어린 시절부터 변태적 성향을 보였다. 20대이던 1996년 3월 길거리에서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을 시도하다 붙잡혀 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전과도 있었다.◇검찰 “사형 선고해달라”→법원, 무기징역 선고강간치상 전과를 숨기고 1999년 7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이듬해 자녀까지 출산했다. 그리고 첫 번째 살인 범행 직후인 2005년엔 둘째 자녀까지 낳으며 보통의 아버지 모습을 하며 생활을 했고, 2009년 또다시 범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용의 선상에조차 오르지 않고 수사망을 피하며 거리를 수년간 활보했다.검찰은 강간살인 등의 혐의로 A씨를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피해자들을 물욕과 성욕 대상으로 삼아 잔인하고 극악한 범행을 연쇄적으로 저질렀다. 반성은커녕 범행을 은폐·축소하려 하고 있어 일말의 교화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다”며 사형을 구형했다.1심은 “잔혹한 범행으로 처참하게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죽는 순간까지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고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며 “범죄에 상응하는 응분의 형벌에 처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검찰의 사형 선고 구형에 대해선 “사형 선택을 고려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생명을 박탈하기보다는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된 상태에서 잘못을 진정으로 참회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이씨는 1심 판결에 대해 “형량이 과도하다”며 항소했다. 하지만 2심도 “1심이 선고한 무기징역형은 이씨의 죄책에 상응하는 적정한 형벌인 것으로 보인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이씨가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 “엄마 백원만” 100원 동전의 첫 등장[그해 오늘]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기습적인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했다. 화폐단위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면서 1953년 이전의 ‘원’화가 부활했다. 단 1953년 이전의 ‘원’화는 지금처럼 한글이 없었고 한자로만 표기됐다.1970년 발행된 100원 주화(위)와 1983년 발행된 100원 주화(사진=한국은행)1960년대 들어 고도성장을 한 한국경제는 70년대 들어 고액 화폐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00원이 기존의 지폐에서 동전으로 바뀌게 됐다. 1970년 11월30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100원짜리 동전이 탄생한 날이다.100원은 백동으로 만들어지는데 소재는 구리 75%, 니켈 25%의 합금이다. 지름은 24mm, 두께는 1.75mm, 무게는 5.42g으로 동전의 테두리에는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톱니가 새겨져 있는데 100원의 경우 톱니 개수는 110개다.동전의 앞 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주조돼 있고 100원을 뜻하는 ‘백원’이라는 글이 쓰여있다. 동전 중 유일하게 인물이 들어가 있다. 뒷면에는 100원을 뜻하는 아라비아 숫자 ‘100’과 제조 연도, ‘한국은행’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100원 동전은 1983년 1월15일 한차례 문양을 변경한다. 동전별로 모양이 상이한 것을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500원짜리와 유사하게 디자인해 통일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종의 ‘패밀리룩’인 셈이다.한국에서 2종류의 100원짜리가 통용되는 배경이다. 100원의 디자인만 바뀌였을 뿐, 합금의 비율이나 무게, 크기 등은 그대로 유지했다. 현재도 500원과 10원짜리를 제외한 동전의 디자인은 83년 1월15일 발표된 것이다.지난 2020년에는 100원짜리 도안이 다시금 변경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100원에 디자인된 이순신 장군의 그림을 그린 월전 장우성 화백이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되면서다. 문화재청이 이순신 표준영정을 해제하면 100원 주화 도안도 변경될 공산이 크다.도안 변경이 확정되면 수집가들에게 있어 100원의 가치가 달라진다. 조폐공사는 매년 현행주화세트(민트)를 판매하는데, 동전 도안이 바뀌면 당해 민트는 마지막 현용주화를 담은 세트가 된다. 한정판 민트세트를 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같은 논리로 100원짜리의 발행 년도에 따라 가치가 나뉜다. 최초 발행 년도인 1970년과 가장 발행량이 적은 1981년, 국제통화기금(IMF) 시대를 맞았던 1998년 100원 주화들이 희귀성을 인정받고 있다. 1970년에는 150만개, 1981년에는 10만개, 1998년에는 500만8000개만이 발행됐다. 가장 발행량이 많았던 2003년 5억8500만개가 쏟아져나왔으니 1981년 동전이 얼마나 희귀한지 가늠할 수 있다. 참고로 1976년에는 100원짜리가 아예 발행되지 않았다.최근 들어 신용카드 및 각종 포인트 등의 등장으로 지폐는 물론, 동전이 화폐로서의 지위를 잃고 있다. 발행량도 급감하는 상황이다. 지난 2021년 100원 주화는 단 10만개만 발행됐고, 2022년에도 40만개 발행에 그쳤다.
    김영환 기자 2022.11.30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기습적인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했다. 화폐단위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면서 1953년 이전의 ‘원’화가 부활했다. 단 1953년 이전의 ‘원’화는 지금처럼 한글이 없었고 한자로만 표기됐다.1970년 발행된 100원 주화(위)와 1983년 발행된 100원 주화(사진=한국은행)1960년대 들어 고도성장을 한 한국경제는 70년대 들어 고액 화폐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00원이 기존의 지폐에서 동전으로 바뀌게 됐다. 1970년 11월30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100원짜리 동전이 탄생한 날이다.100원은 백동으로 만들어지는데 소재는 구리 75%, 니켈 25%의 합금이다. 지름은 24mm, 두께는 1.75mm, 무게는 5.42g으로 동전의 테두리에는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톱니가 새겨져 있는데 100원의 경우 톱니 개수는 110개다.동전의 앞 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주조돼 있고 100원을 뜻하는 ‘백원’이라는 글이 쓰여있다. 동전 중 유일하게 인물이 들어가 있다. 뒷면에는 100원을 뜻하는 아라비아 숫자 ‘100’과 제조 연도, ‘한국은행’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100원 동전은 1983년 1월15일 한차례 문양을 변경한다. 동전별로 모양이 상이한 것을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500원짜리와 유사하게 디자인해 통일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종의 ‘패밀리룩’인 셈이다.한국에서 2종류의 100원짜리가 통용되는 배경이다. 100원의 디자인만 바뀌였을 뿐, 합금의 비율이나 무게, 크기 등은 그대로 유지했다. 현재도 500원과 10원짜리를 제외한 동전의 디자인은 83년 1월15일 발표된 것이다.지난 2020년에는 100원짜리 도안이 다시금 변경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100원에 디자인된 이순신 장군의 그림을 그린 월전 장우성 화백이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되면서다. 문화재청이 이순신 표준영정을 해제하면 100원 주화 도안도 변경될 공산이 크다.도안 변경이 확정되면 수집가들에게 있어 100원의 가치가 달라진다. 조폐공사는 매년 현행주화세트(민트)를 판매하는데, 동전 도안이 바뀌면 당해 민트는 마지막 현용주화를 담은 세트가 된다. 한정판 민트세트를 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같은 논리로 100원짜리의 발행 년도에 따라 가치가 나뉜다. 최초 발행 년도인 1970년과 가장 발행량이 적은 1981년, 국제통화기금(IMF) 시대를 맞았던 1998년 100원 주화들이 희귀성을 인정받고 있다. 1970년에는 150만개, 1981년에는 10만개, 1998년에는 500만8000개만이 발행됐다. 가장 발행량이 많았던 2003년 5억8500만개가 쏟아져나왔으니 1981년 동전이 얼마나 희귀한지 가늠할 수 있다. 참고로 1976년에는 100원짜리가 아예 발행되지 않았다.최근 들어 신용카드 및 각종 포인트 등의 등장으로 지폐는 물론, 동전이 화폐로서의 지위를 잃고 있다. 발행량도 급감하는 상황이다. 지난 2021년 100원 주화는 단 10만개만 발행됐고, 2022년에도 40만개 발행에 그쳤다.
  • '윤창호법 4년'…여론과 위헌의 줄타기[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휴가를 나온 군인 윤창호씨가 2018년 9월26일 새벽 2시25분께 음주운전 차에 치였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가해자는 혈중 알코올 농도 0.181% 만취 상태로 자신의 차량을 몰다가 사고를 냈다. 이 사고로 윤씨는 뇌사 상태에 빠져 그해 11월9일 숨을 거뒀다.앞날이 유망한 청년의 허망한 죽음에 공분이 일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음주운전자를 강하게 처벌하라는 여론이 힘을 받아 일어섰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은 40만 명이 넘게 동의했다. 그러자 국회가 움직여 법을 고쳤다. 법 개정은 ‘처벌 수위 강화’와 ‘재범 억제’ 등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됐다.2018년 10월21일 당시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왼쪽 네 번째)이 윤창호씨 지인과 함께 국회 정론관에서 음주운전자의 처벌을 강화하는 ‘윤창호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우선 처벌 수위를 강화하고자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 11을 고쳤다. 음주운전 상해 형량을 종전 ‘10년 이하 징역 또는 최소 500만 원 이상 벌금’에서 ‘1년 이상 15년 이하 징역 또는 최소 1000만 원 이상 벌금’으로 고쳤다. 음주운전 사망 형량은 종전 ‘1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무기 또는 3년 이상 징역’으로 높아졌다.나머지 하나 재범 억제를 위해 가중처벌이 세졌다. 도로교통법을 고쳐서 음주 운전·측정 거부가 뭐든 두 차례 적발되면 2년 이상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이상 2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조항(도로교통법 148조의2 1항)을 마련했다. 이밖에 같은 법을 고쳐서 △음주운전 기준 하향 △운전면허 결격기간 연장 △면허취소 조건 강화 등이 뒤따랐다.여야는 이견 없이 해당 내용으로 법을 고치는 데 합의했다. 윤창호 법은 2018년 11월29일 특가법 부분이, 2018년 12월6일 도로교통법 부분이 각각 본회의를 통과했다. 대법원도 2020년 4월 음주운전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양형 기준을 새로이 내놓았다.음주운전 엄벌주의가 도입되자 얼마큼 효과가 나타났다. 서울경찰청이 따져보니, 음주운전 교통사고 건수는 윤창호 법 시행 1년 전보다 시행 1년 차에 24.9%, 2년 차에 19.8% 각각 줄었다. 숙취가 남은 운전자들이 아침 출근길에 대리운전을 부르는 사회 현상도 나타났다.제도를 시행해보니 부작용도 들려왔다. 수십 년 전에 음주운전을 하거나 음주측정을 거부한 이조차도 지금 재범하게 되면 최소 징역 2년 이상에 처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음주운전·측정거부에 따른 결과가 훈방인지, 형사처벌인지를 따지지도 않고 지금에서야 무조건 엄벌하는 것도 적절한지에 대한 지적이 붙었다.이런 이유를 들어 헌재는 작년 11월과 올해 5월, 8월 세 차례에 걸쳐서 가중처벌 조항이 담긴 도로교통법 148조의2 1항에 위헌을 결정했다. 과잉입법이라는 의미다. 입법이 민의를 담아내는 것은 맞지만, 수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너무 앞선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 붙었다. 애초 특가법상 음주운전 사망의 최소 형량을 정할 당시, 원안은 5년 이상 징역이었는데 논의 과정에서 줄어든 게 최소한 3년 이상 징역이었다.뒤늦은 논쟁은 뒤로한 채, 헌재 결정으로 윤창호 법 재심 재판이 늘었다. 가중처벌 조항으로 처벌받은 이들이었다. 이로써 법원은 재판할 여력을 여기에 쏟아야 하고, 재판 당사자는 재판받을 기회가 분산할 수밖에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음주운전 교통사고는 법시행 이후 반짝 그쳤을 뿐, 줄어들지 않았다. 2020년 음주운전 교통사고는 전년보다 약 10% 늘어난 1만7200여건이다.‘윤창호 가해자’는 윤창호 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법률이 개정되기 전에 사건이 발생한 탓이다. 부산지법은 2019년 2월 윤씨의 가해자 박모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에서 정한 해당 사건 양형 기준(징역 1년~4년6월)을 웃돈 판결이었다. 여론은 처벌이 수위가 약하다는 쪽으로 쏠렸다. 판결은 항소심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전재욱 기자 2022.11.29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휴가를 나온 군인 윤창호씨가 2018년 9월26일 새벽 2시25분께 음주운전 차에 치였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가해자는 혈중 알코올 농도 0.181% 만취 상태로 자신의 차량을 몰다가 사고를 냈다. 이 사고로 윤씨는 뇌사 상태에 빠져 그해 11월9일 숨을 거뒀다.앞날이 유망한 청년의 허망한 죽음에 공분이 일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음주운전자를 강하게 처벌하라는 여론이 힘을 받아 일어섰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은 40만 명이 넘게 동의했다. 그러자 국회가 움직여 법을 고쳤다. 법 개정은 ‘처벌 수위 강화’와 ‘재범 억제’ 등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됐다.2018년 10월21일 당시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왼쪽 네 번째)이 윤창호씨 지인과 함께 국회 정론관에서 음주운전자의 처벌을 강화하는 ‘윤창호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우선 처벌 수위를 강화하고자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 11을 고쳤다. 음주운전 상해 형량을 종전 ‘10년 이하 징역 또는 최소 500만 원 이상 벌금’에서 ‘1년 이상 15년 이하 징역 또는 최소 1000만 원 이상 벌금’으로 고쳤다. 음주운전 사망 형량은 종전 ‘1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무기 또는 3년 이상 징역’으로 높아졌다.나머지 하나 재범 억제를 위해 가중처벌이 세졌다. 도로교통법을 고쳐서 음주 운전·측정 거부가 뭐든 두 차례 적발되면 2년 이상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이상 2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조항(도로교통법 148조의2 1항)을 마련했다. 이밖에 같은 법을 고쳐서 △음주운전 기준 하향 △운전면허 결격기간 연장 △면허취소 조건 강화 등이 뒤따랐다.여야는 이견 없이 해당 내용으로 법을 고치는 데 합의했다. 윤창호 법은 2018년 11월29일 특가법 부분이, 2018년 12월6일 도로교통법 부분이 각각 본회의를 통과했다. 대법원도 2020년 4월 음주운전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양형 기준을 새로이 내놓았다.음주운전 엄벌주의가 도입되자 얼마큼 효과가 나타났다. 서울경찰청이 따져보니, 음주운전 교통사고 건수는 윤창호 법 시행 1년 전보다 시행 1년 차에 24.9%, 2년 차에 19.8% 각각 줄었다. 숙취가 남은 운전자들이 아침 출근길에 대리운전을 부르는 사회 현상도 나타났다.제도를 시행해보니 부작용도 들려왔다. 수십 년 전에 음주운전을 하거나 음주측정을 거부한 이조차도 지금 재범하게 되면 최소 징역 2년 이상에 처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음주운전·측정거부에 따른 결과가 훈방인지, 형사처벌인지를 따지지도 않고 지금에서야 무조건 엄벌하는 것도 적절한지에 대한 지적이 붙었다.이런 이유를 들어 헌재는 작년 11월과 올해 5월, 8월 세 차례에 걸쳐서 가중처벌 조항이 담긴 도로교통법 148조의2 1항에 위헌을 결정했다. 과잉입법이라는 의미다. 입법이 민의를 담아내는 것은 맞지만, 수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너무 앞선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 붙었다. 애초 특가법상 음주운전 사망의 최소 형량을 정할 당시, 원안은 5년 이상 징역이었는데 논의 과정에서 줄어든 게 최소한 3년 이상 징역이었다.뒤늦은 논쟁은 뒤로한 채, 헌재 결정으로 윤창호 법 재심 재판이 늘었다. 가중처벌 조항으로 처벌받은 이들이었다. 이로써 법원은 재판할 여력을 여기에 쏟아야 하고, 재판 당사자는 재판받을 기회가 분산할 수밖에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음주운전 교통사고는 법시행 이후 반짝 그쳤을 뿐, 줄어들지 않았다. 2020년 음주운전 교통사고는 전년보다 약 10% 늘어난 1만7200여건이다.‘윤창호 가해자’는 윤창호 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법률이 개정되기 전에 사건이 발생한 탓이다. 부산지법은 2019년 2월 윤씨의 가해자 박모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에서 정한 해당 사건 양형 기준(징역 1년~4년6월)을 웃돈 판결이었다. 여론은 처벌이 수위가 약하다는 쪽으로 쏠렸다. 판결은 항소심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 '사형은 합헌' 첫결정..헌재는 변했을까[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3년 5월. 다섯 살 난 유치원 여아의 혀가 잘린 사건이 발생했다. 20대 남성이 여아를 성폭행하려다가 여의찮자 저지른 범행이었다. 수사해보니 범인은 구치소에 있었다. 열살 초등생 여아를 성폭행하려다가 실패하자 살해한 뒤 주검을 불에 태우고 자수한 정모씨였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자수한 정씨는 재판을 받으면서 태도를 바꿨다. 자신이 자수한 이유는 구속된 형을 석방하고 자신에게 5년 미만 징역형을 선고받도록 해준다는 경찰의 회유 탓이라고 했다. 수사기관에서 한 자백도 이걸 믿고 한 거짓말이라고 했다.1심은 그의 태도 변화를 믿지 않고 그해 10월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혐의 모두를 유죄로 인정했다. 이어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반성하지 않으며 ▲강간치상 등 전과가 있고 ▲피해자와 가족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김 점을 두루 고려해 “사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2심도 마찬가지로 사형을 선고했다.헌재 휘장.(사진=헌재)궁지에 몰린 정씨는 1995년 1월 헌법재판소로 갔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근거인 형법 41조와 250조에 헌법 소원을 냈다. 형법 41조는 형의 종류 가운데 하나로 사형을 인정하고, 250조는 살인죄는 사형에 처한다고 정한다. 사형제는 형법상 근거가 없으니 자신에게 선고된 사형 선고도 무효라는 게 정씨 주장이었다.헌법재판소는 1996년11월28일 형법 41조와 250조에 각각 합헌을 결정했다. 정씨가 청구한 헌법소원에 대한 판단이었다. 헌재 재판관 9명 가운데 7명이 합헌이라고, 나머지 2명은 위헌이라고 각각 의견을 냈다.헌재는 “생명권은 헌법의 기본권이지만 모든 규범을 초월해 영구히 타당한 권리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며 “다른 생명 또는 이에 못지않은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불가피하게 적용하는 사형제는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형이 다른 형벌보다 위압감이 커서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범죄에 대한 응보 욕구가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이라고 봤다.다만 “위헌과 합헌 논의를 떠나 사형 존치 여부는 진지하게 계속 논의해야 한다”며 “시대 상황이 바뀌어 사형으로 범죄 예방 필요성이 없게 되거나, 국민 법감정이 그렇게 인식을 하면 사형은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헌재가 사형제에 대한 판단을 내놓은 것은 1988년 기관이 설립하고 처음이었다. 그간 여러 사형수가 헌법소원을 냈지만,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모두 각하했다. 이런 이유에서 헌재는 정씨의 헌법소원에 대한 답을 내놓고자 머리를 싸매고 고심했다. 기본권 수호의 최후 보루 기관으로서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수준이었다.헌재의 노력이 무색할 만큼 정씨 형사 사건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대법원은 1994년 12월 정씨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정씨의 진술은 인정했지만, 증거와 증언이 객관적인 사실과 어긋나는 게 흠이었다. 이로써 정씨는 일부 혐의가 무죄가 날 여지가 있고, 그러면 형량이 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씨는 헌법소원을 냈던 것이다.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2부는 1995년 5월 혀 절단은 무죄로, 초등생 살인 및 사체유기죄는 유죄로 각각 인정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정씨의 파기환송심 재판장은 당시 이강국 서울고법부장이다. 이 고법부장은 훗날(2007년)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됐다. 헌재는 2010년 2월 사형제 위헌 여부에 대한 역대 두 번째 판단을 내놓았다. 재판관 5대 4 의견으로 다시금 사형제를 합헌이라고 유지했는데, 당시 이 소장은 ‘합헌 의견’을 냈다.현재 헌재는 사형제가 합헌인지를 심리하는 세 번째 심리에 착수한 상태다.
    전재욱 기자 2022.11.28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93년 5월. 다섯 살 난 유치원 여아의 혀가 잘린 사건이 발생했다. 20대 남성이 여아를 성폭행하려다가 여의찮자 저지른 범행이었다. 수사해보니 범인은 구치소에 있었다. 열살 초등생 여아를 성폭행하려다가 실패하자 살해한 뒤 주검을 불에 태우고 자수한 정모씨였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자수한 정씨는 재판을 받으면서 태도를 바꿨다. 자신이 자수한 이유는 구속된 형을 석방하고 자신에게 5년 미만 징역형을 선고받도록 해준다는 경찰의 회유 탓이라고 했다. 수사기관에서 한 자백도 이걸 믿고 한 거짓말이라고 했다.1심은 그의 태도 변화를 믿지 않고 그해 10월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혐의 모두를 유죄로 인정했다. 이어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반성하지 않으며 ▲강간치상 등 전과가 있고 ▲피해자와 가족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김 점을 두루 고려해 “사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2심도 마찬가지로 사형을 선고했다.헌재 휘장.(사진=헌재)궁지에 몰린 정씨는 1995년 1월 헌법재판소로 갔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근거인 형법 41조와 250조에 헌법 소원을 냈다. 형법 41조는 형의 종류 가운데 하나로 사형을 인정하고, 250조는 살인죄는 사형에 처한다고 정한다. 사형제는 형법상 근거가 없으니 자신에게 선고된 사형 선고도 무효라는 게 정씨 주장이었다.헌법재판소는 1996년11월28일 형법 41조와 250조에 각각 합헌을 결정했다. 정씨가 청구한 헌법소원에 대한 판단이었다. 헌재 재판관 9명 가운데 7명이 합헌이라고, 나머지 2명은 위헌이라고 각각 의견을 냈다.헌재는 “생명권은 헌법의 기본권이지만 모든 규범을 초월해 영구히 타당한 권리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며 “다른 생명 또는 이에 못지않은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불가피하게 적용하는 사형제는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형이 다른 형벌보다 위압감이 커서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범죄에 대한 응보 욕구가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이라고 봤다.다만 “위헌과 합헌 논의를 떠나 사형 존치 여부는 진지하게 계속 논의해야 한다”며 “시대 상황이 바뀌어 사형으로 범죄 예방 필요성이 없게 되거나, 국민 법감정이 그렇게 인식을 하면 사형은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헌재가 사형제에 대한 판단을 내놓은 것은 1988년 기관이 설립하고 처음이었다. 그간 여러 사형수가 헌법소원을 냈지만,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모두 각하했다. 이런 이유에서 헌재는 정씨의 헌법소원에 대한 답을 내놓고자 머리를 싸매고 고심했다. 기본권 수호의 최후 보루 기관으로서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수준이었다.헌재의 노력이 무색할 만큼 정씨 형사 사건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대법원은 1994년 12월 정씨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정씨의 진술은 인정했지만, 증거와 증언이 객관적인 사실과 어긋나는 게 흠이었다. 이로써 정씨는 일부 혐의가 무죄가 날 여지가 있고, 그러면 형량이 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씨는 헌법소원을 냈던 것이다.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2부는 1995년 5월 혀 절단은 무죄로, 초등생 살인 및 사체유기죄는 유죄로 각각 인정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정씨의 파기환송심 재판장은 당시 이강국 서울고법부장이다. 이 고법부장은 훗날(2007년)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됐다. 헌재는 2010년 2월 사형제 위헌 여부에 대한 역대 두 번째 판단을 내놓았다. 재판관 5대 4 의견으로 다시금 사형제를 합헌이라고 유지했는데, 당시 이 소장은 ‘합헌 의견’을 냈다.현재 헌재는 사형제가 합헌인지를 심리하는 세 번째 심리에 착수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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