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로스가 바다로 추락하든 말든[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18>

▲보티첼리·브뤼헐·프리드리히가 빠져든 '바다'
비너스 탄생시킨 자애로운 신화 속 바다
비상꿈꾼 이카로스는 잔인하게 집어삼켜
아득한 바다 앞에 사색 빠져든 한 수도사
유한한 인간의 삶 너머 무한한 근원 갈망
  • 등록 2022-01-08 오전 12:01:00

    수정 2022-01-08 오전 12:01:00

피터르 브뤼헐이 1558년 그린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초기에는 풍경화가로 인기를 얻었으나 이후엔 소박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농민을 높은 휴머니즘, 예리한 사회비판적 관점에서 그려냈다. 덕분에 ‘농민화가’ 혹은 ‘농민 브뤼헐’로 불린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카로스는 그리스신화 속 인물. 건축가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날개를 달고 미궁에서 탈출하던 중,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했다가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으면서 에게해로 떨어져 죽음을 맞는다. 작품은 이카로스의 추락보다 그 추락을 알아채지 못한 모두의 무심함을 주제로 삼았다. 캔버스에 유채, 73.5×112㎝,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큐레이터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큐레이터·미술평론가] 인간의 발걸음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바다가 시작된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는 인간의 신화적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해 마치 밤하늘의 별을 엮어 별자리를 만드는 것처럼 용궁이나 인어와 같이 인간세상과 비슷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용왕의 대접을 받고 연꽃에 감싸여 다시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그런 것이고, 용왕의 건강문제로 토끼간을 가지러 육지로 올라왔던 자라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의 그림에서 바다는 수많은 풍경으로, 특히 근대 이후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여가의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이전 시대에는 역시 수많은 신화와 연결돼 등장한다. 화가들이 바다 풍경과 더불어 그리고 싶어했던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는 비너스 이야기였다. 비너스는 완전히 다 성숙한 여인의 몸으로 바다에서 태어난 신이기 때문이다. 비너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잘린 성기가 바다에 떨어져 만들어진 태생이 독특한 여신이라, 바다로부터 육지로 올 때는 종종 커다란 조가비를 타고 등장한다. 이탈리아 메디치가문의 후원을 받아 피렌체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중심에 있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1485)은, 기독교가 중심이던 중세 내내 이교라 핍박받던 그리스로마신화가 르네상스에 이르러 화려하게 부활하는 신호탄 같은 작품이었다.

화면의 왼쪽에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비너스를 육지로 밀어오는 제피로스와 화면 오른쪽에 황급히 비너스가 입을 옷을 준비하는 플로라가 그림의 역동성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정작 조가비 위에 몸을 가리고 서 있는 비너스는 너무도 평온한 모습이다. 곁에는 꽃들이 떨어지고 서풍에 긴 머릿결이 흩날리지만, 이 정신없는 중에도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비너스의 눈빛이야말로 이 그림을 한없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너무 유명한 이 그림을 두고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는데, 바로 바닷물의 표현법에 대한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7).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 거장으로 꼽히는 보티첼리의 걸작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과 섬세한 묘사로 우아하고 기품있는 여성상을 그려냈다. 사실주의를 무시하고 양식화한 표현이 도드라진, 가령 인물의 신체에서 느껴지지 않는 무게감이나 비례·자세 등을 왜곡하는 보티첼리의 특징을 온전히 품었다.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9㎝,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고요한 역동성 표현한 보티첼리의 바다

바다는 푸른빛이다. 바닷물을 손으로 한 줌 뜨면 여전히 투명하지만, 거대한 풍경으로서의 바다는 맑거나 흐린 하늘빛을 반영해, 깊고 얕음에 따라, 바닷속 땅이 어떤 색인가에 따라 에메랄드 빛을 띠기도, 코발트블루 빛을 띠기도, 검은빛을 띠기도 한다. 보티첼리의 그림 속에서 바다는 청량감을 주는 밝은 청록색으로 빛나고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잔잔한 파도는 V자형으로 패턴화해 그려져 있고, 비너스가 올라 있는 조가비 근처에 부딪히는 파도만이 불규칙하게 보인다.

인물의 형태와 배치에 온 힘을 기울였을 보티첼리가 이 모든 서사의 배경이 될 바다의 풍경 앞에서 파도의 묘사에 얼마나 고심을 했을까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를 표현하려 그는 조색을 거듭하고 파도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 수없이 연습했을 것이다. 비너스를 태운, 그러나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사뿐하게 발을 딛고 해안으로 밀려온 가리비가 떠 있는 바다를 묘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보티첼리는 붓끝에 흰 물감을 묻혀 조심스럽게 갈매기 모양의 파도를 그려 고요한 역동성을 만들어냈다.

신화와 연결된 바다의 모습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 삶 속으로 이끌려 들어왔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1558)에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먼저 눈에 띈다. 화면의 가장 앞에는 말을 앞세워 밭을 가는 농부가 있고, 그 안쪽에는 개 한 마리를 대동한 채 양을 치는 사람이 보인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이고, 연안에 떠 있는 배도 물고기를 잡는 어선일 것이다. 먼바다에도 어선이 몇 척 떠 있고 그 너머로 도시의 풍경도 보인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풍경이지만, 놀랍게도 이 그림 속에는 신화 이야기가 들어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 큰 어선과 낚시하는 사람의 사이에 누군가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 말이다. 파도 위로 살짝 보이는 한쪽 팔과 두 다리를 퍼덕이는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피터르 브뤼헐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1558)의 부분을 클로즈업했다.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했다가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으면서 바다로 빠진 이카로스가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순간을 묘사했다.


농담처럼 그려낸 브뤼헐의 추락한 이카로스

그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올랐다가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한 이카로스다. 이카로스는 날아오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한계를 잊고 더 높이 오르고자 했다가 날개를 잃고 바다에 떨어져 죽음을 맞은 신화 속 인물인 것이다. 이카로스의 죽음은 인간에게 한계 내에서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준 건가, 아니면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영웅적인 도전은 기억될 만하다는 메시지인가. 하지만 브뤼헐의 그림 속에서 이카로스의 추락은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필부의 죽음일 뿐이다.

어느 누가 이 그림을 보고 첫눈에 ‘이카로스의 추락’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물에서 허우적대는 이가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고자 했던 인물이라는 설명이 그림 어느 구석에 있는가 말이다. 그가 빠진 바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바다다. 하지만 다들 자신의 생업이 바빠 그의 추락은 말 한 필, 양 한 마리보다 중요치 않다. 아무도 그의 몸부림에 눈길을 주고 않았고, 그는 그대로 바다에 빠져 익사할 것이다. 이렇게 고독한 죽음이라니, 브뤼헐은 농담처럼 이카로스의 죽음을 그렸다. 아무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 죽음, 죽음 이후에도 세상은 하나 변할 것 없이 돌아갈 게 자명한 죽음, 브뤼헐이 그린 이카로스의 죽음은 농담이 아니라 세상의 진실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었을까.

바다는 때때로 이렇게 인간을 삼킨다. 그래서 아름다우면서도 두렵다. 독일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는 거대한 바다 앞에 홀로 선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감정을 그림에 담았다. ‘바닷가의 수도사’(1808∼1810)에서 인간은 보잘 것 없이 작다. 드넓은 하늘과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수직으로 서 있는 수도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검은 수평선 너머로부터 몰려오는 어둠인 듯하다. 해가 진 뒤인지 뜨기 전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대의 풍경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1808∼1810). 계절변화나 자연풍광을 주요 소재로 삼아 작업한 프리드리히는 그중 가을·겨울·새벽 등의 정경을 독특한 정적감으로 표현했는데, 자주 그린 안개나 눈, 일몰·달밤은 색채와 명암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드러냈다. 작품에 간혹 세운 사람의 뒷모습은 역사와 문화의 공허함, 그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고뇌를 상징한다. 캔버스에 유채, 110×171.5㎝, 독일 베를린 알테 나치오날 갤러리 소장.


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들, 바다의 깊이만 할까

이 그림에서 땅과 바다와 하늘은 신화나 인간적 서사의 ‘배경’이 아니다. 프리드리히의 바다 풍경은 복닥거리는 인간사를 넘어,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을 넘어,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걸 골라내는 인간의 미적 감각을 넘어, 세상의 시작과 끝에 대해, 또 인간의 유한한 삶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그림 앞에서 수도사의 위치에 서게 된다. 수도사는 땅에 발을 딛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연 속 미물인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광대한 풍경 앞에서 나 자신이 숨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도,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두려움과 더불어 인간의 사유가 가 닿지 못하는 근원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고양의 감정을 갖게 된다. 인간 문명이 아무리 하늘을 찌를 듯한 기교를 부려 인간만의 세상을 만들어내더라도, 자연의 장엄함 앞에서는 그저 말을 잊게 만드는 곳, 바다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지만, 걸음을 멈추고 사유란 것을 하게 만드는 장소기도 한 것이다.

△이윤희 큐레이터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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