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하상렬 기자] 첫돌을 맞이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통신조회 논란의 수렁에서 해가 바뀌어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공수처가 언론인·야당 국회의원·시민사회 인사를 포함한 수백 명의 통신자료를 무차별적으로 조회한 것이 드러나며 촉발된 논란은 관련 제도 개편 목소리까지 이어지고 있다.
| 김진욱 공수처장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법사위 회의장 앞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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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은 공수처가 저인망식 통신자료 조회와 관련해 “적법한 절차였다”고만 강조하면서 증폭됐다. 수사권 오남용에 대한 성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성은커녕 사건 수가 현저히 차이 나는 검경에 비해 통신조회 수가 적다며 억울함을 토로해 정치권 등의 질타를 받았다. 검경의 수사 관행을 따랐다는 설명은 공수처 설립 취지를 망각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공수처가 촉발한 논란은 검경을 포함한 전체 수사기관의 문제로 확대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통신사업자가 공수처를 포함해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에 넘긴 통신자료 건수는 전화번호 수 기준 약 256만 건에 달한다. 수사기관별로는 공수처 135건, 검찰 40만5791건, 경찰 5만3426건이다.
통신자료 조회의 근거 법률은 전기통신사업법(이하 전통법) 83조이다. 전통법 83조 3항에 따르면 통신사는 법원이나 수사기관 등이 요청하면 이용자의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통신사 가입일 또는 해지일 등을 제공할 수 있다.
전통법 83조는 과거부터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법원 허가 없는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조회는 수사권 남용이자,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 침해로 이어진다는 비판이다. 수사기관이 당사자에게 조회 사실을 통지해야 할 의무가 없기에 당사자가 통신사를 통해 이를 조회해 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어 사실상 영장주의에 위배된다는 논리다. 헌법재판소는 해당 조항에 대한 법원의 통제 절차가 없다는 점과 관련해 참여연대 등이 청구한 헌법소원을 심리 중이다.
일각에선 1977년 제정된 이 법이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정 당시엔 집에 유선전화 하나만 있었지만,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지금은 이름·전화번호·주민등록번호 등 통신자료만 있으면 쉽게 개인을 특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적사항만으로도 상당 부분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고, 범죄 위협에도 놓일 수 있는 셈이다.
제도 개선 방안으로는 통신자료 조회 사실을 당사자에게 의무적으로 통보하도록 하는 안이 제기된다. 현재 국회에는 해당 내용이 포함된 전통법 개정안이 총 7건 발의돼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양홍석 법무법인 이공 변호사는 “통지 자체가 수사기관이 법원 허가 없이 통신자료를 독자적 판단으로 가져가는 제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며 “통지 제도를 개선하려면 수사기관이 어떤 필요에 의해 조회 대상자의 정보를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통지서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