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여기 ‘수상한’ 연구소가 있다. 귀신 들린 물건이나 동물을 관리하는 곳이다. 연구소에 밤이 찾아오면 초자연 현상이 곧잘 나타난다. 야간 순찰직을 맡은 직원들은 “한밤의 시간표에 따라 복도를 돌며 반복적으로 잠긴 문들을 확인”해야 한다. 이들에겐 특별한 규칙이 있다. 순찰하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돌아보거나, 말을 걸면 안된다. 누군가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된다”고 하면 다른 길로 가야하고, 기척이 들려도 무시할 것, 또 혼자 있을 때 오는 전화를 받지 말아야 한다.(단편소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지난해 영국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후보에 올라 화제를 모았던 ‘저주토끼’의 정보라(47) 작가가 작정하고 쓴 ‘귀신 이야기’다. 신작 ‘한밤의 시간표’(퍼플레인)다. ‘저주토끼’(아작) 이후 처음으로 펴낸 신작 소설집이다.
책은 연구소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직원들과 그곳에서 보관하는 물건들에 얽힌 일곱 편의 기이한 이야기를 담았다.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 대표되는 연구소는 소설 속에서 불신과 불안의 장소로 바뀐다. 주로 연구소 신입 직원인 ‘나’에게 ‘선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전 식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독자들에게 공포심을 더 자극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혹시 지금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사람이 맞는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근원적인 모호함이 배가되는 탓이다.
괴담이 펼쳐지지만 단순히 공포와 두려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왜 안 만나줘’를 주장하는 유부남 이야기엔 교제폭력, 스토킹을 말하고, 성소수자인 야간경비원 ‘찬’을 통해 혐오와 차별을 꺼내든다. 비인간에 대한 연민과 돌봄, 연구소로 상징되는 이성과 합리에 기반한 질서들에 의문을 던진다.
작품 해설을 쓴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위트와 풍자, 비판과 연민이 뒤섞이는 복합적 감정이야말로 우리가 정보라의 소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섬세한 공포이자 대범한 풍자”라며 “공포 너머의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 이것이 단지 무서운 경험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적었다.
소설가 강화길은 “정보라의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삶 자체가 한편의 괴담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며 “한없이 이어지는 스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했다. 소설가 김보영은 “정보라 작가의 괴담은 기이하며 신령하다. 죄 없이 핍박받는 민초를 위한 씻김굿”, “현실에서 위안받지 못한 이들에게, 실체 바깥에서 날갯짓하며 내려와 서린 한을 풀어주고 간다”며 정 작가의 책을 추천했다.
정 작가는 글이 나오지 않을 때 최후의 방책으로 “귀신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어디서 귀신이 나오면 제일 무서울지 궁리하다 보면 어떻게든 글이 풀린다. 쓰면서 정말 재미있었다. 독자들이 괴담 프로그램을 보듯 마음 편하게 즐겨주면 좋겠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