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플방지]'서울역 묻지마 폭행범'은 어디에..."덕분에 두렵다"

법원 "긴급체포 위법"...경찰 "제2의 피해 막고자"
"피해자가 '피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세요"
구속영장 기각 후 또 다른 폭행 드러나
  • 등록 2020-06-06 오전 12:05:02

    수정 2020-06-06 오전 12:05:02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덕분에 이제 피해를 고발했던 우리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법원이 이른바 ‘서울역 묻지마 폭행’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피해자 가족 측이 지난 5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밝힌 심경이다.

피해자 가족 측은 또 법원의 기각 사유 중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채인데 비록 범죄 혐의라 할지라도 주거의 평온 보호에 예외를 둘 수 없다”는 부분을 가리키며 “최근 본 문장 중 가장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은 잠도 못 자고 불안에 떨며 일상이 파괴됐는데 가해자의 수면권과 주거의 평온을 보장해주는 법이라니, 대단하다”며 “제 동생(피해자)과 추가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이른바 ‘서울역 묻지마 폭행’ 뒤 달아나는 이모(32) 씨의 모습이 현장 CCTV에 포착됐다 (사진=JTBC ‘뉴스룸’ 캡처)
“피의자가 잠을 자고 있어…”

이모(32)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1시50분께 공항철도 서울역 1층에서 처음 보는 30대 여성 A씨의 얼굴 등을 때려 상처를 입히고 도주한 혐의를 받는다.

A씨는 당시 이씨의 폭행으로 인해 광대뼈가 함몰되는 등 중상을 입었지만,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 CC(폐쇄회로)TV가 없어 경찰은 일주일 가까이 용의자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A씨 가족은 SNS와 라디오 프로그램 등을 통해 피해 사실을 알렸고, 온라인상에선 여성 혐오 범죄가 또다시 일어났다며 공분이 일었다.

이후 철도특별사법경찰대(철도경찰)는 경찰과 함께 지난 2일 이씨를 서울 동작구 자택에서 긴급체포한 뒤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김동현 영장전담판사는 지난 4일 철도경찰의 긴급체포가 위법했고 여기에 기초한 구속영장 청구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이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이례적으로 상세한 사유도 공개했다.

경찰의 체포 과정에 대해 “수사기관은 인근 CC(폐쇄회로)TV 영상과 주민 탐문 등을 통해 피의자의 성명, 주거지, 휴대전화 번호를 파악한 뒤 피의자의 주거지를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며 전화를 걸었으나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강제로 출입문을 개방해 주거지로 들어간 뒤 잠을 자던 피의자를 긴급체포했다”고 설명했다.

또 이러한 과정에 대해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신원과 주거지 및 휴대전화 번호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피의자가 주거지에서 잠을 자고 있어 증거를 인멸할 상황도 아니었다”며 긴급체포가 위법한 이상 그에 기초한 이 사건 구속영장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긴급체포는 피의자가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하는 절차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피해자가 ‘피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법원의 결정에 비난의 화살은 법원뿐만 아니라 철도경찰에 돌아갔다.

A씨 가족은 “철도경찰은 체포과정을 몰라서 이런 실수를 한 건가? 체포를 한 두 번 하시는 게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이걸 받아들여야 하나? 의문투성이라 화낼 힘도 안난다”고 했다.

그러자 철도경찰은 5일 오후 “피의자가 불특정 다수에게 몸을 부딪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해 제2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신속히 검거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체포 당시 피의자가 주거지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두드리고 전화했으나 휴대전화 벨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 도주 및 극단적 선택 등 우려가 있어 불가피하게 체포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법원 기각 사유를 검토한 후, 향후 법과 원칙에 따라 여죄 등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했다.

이에 앞서 철도경찰 관계자는 “(체포) 당시 검사의 지휘도 받았었다”며 “왜 가해자를 잡지 못했느냐는 여론의 압박도 고려해야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이씨를 무리하게 붙잡았다는 이유로 다시 풀어줘야 하는 상황에서, 이씨가 또 다른 여성을 폭행한 혐의로 뒤늦게 입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A씨 가족은 “추가 피해자가 지금 몇 명인지 모르는가? 범죄를 막기 위해 두려움을 뒤로하고 목소리를 낸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르는가?”라며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를 고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것들과 싸우고 고통받아야 한다. 때문에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 제발 피해자가 ‘피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묻지마 범죄’는 어디에

앞서 A씨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평범한 30대 남성이어서 더 참담한 기분과 무서움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부딪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욕을 하고 가격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하필이면 CCTV 사각지대가 있는 곳에서 그랬다는 게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범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다시는 서울역에서, 특히 대낮에 이런 약자를 타깃으로 한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런 생각에서 제가 더 공론화를 시키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지난 4일 ‘서울역 묻지마 폭행’ 피의자 이씨가 서울 용산경찰서에서 구속영장실질심사 출석을 앞두고 추가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철도경찰대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씨가 저지른 ‘묻지마’ 범죄는 우리 모두에게 두렵게 다가온다.

60대 여성 한모씨는 “딸이 매일 서울역 인근 직장으로 출근하는데, 이씨가 풀려나서 돌아다니다 또 똑같은 짓을 할까 봐 걱정”이라며 분노했다. 또 30대 남성 박모씨는 “뉴스에 나온 CCTV에서 이씨가 사람들에게 어깨빵(마주 오는 행인을 어깨로 밀치는 행위를 일컫는 은어)하는 장면을 봤는데, 부모님 생각이 나더라. 나이 든 어머니, 아버지가 그렇게 부딪혔다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지고 크게 다치셨을 거다. 그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씨는 서울역 묻지마 폭행 외에도 지난 2월 동작구 한 횡단 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여성에게 욕설을 하고 침을 뱉은 혐의를 추가로 받았다.

A씨 가족의 우려대로 이 사건 피해자는 당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까 두려워 고소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씨는 지난달 초 이웃 주민을 때린 혐의도 받고 있다.

이씨는 A씨 폭행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한다면서도 범행은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혐의를 인정했다가 부인하는 등 진술을 수차례 번복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그는 범행 전에도 낯선 행인에게 시비를 거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인 사실이 CCTV를 통해 드러났다.

경찰은 이씨가 과거 정신적 질환으로 수년 동안 치료를 받은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씨 부모는 아들을 정신병원에 데려가 필요하면 입원 치료를 받게 하겠다는 입장을 철도경찰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현재 부모와 함께 지방에 내려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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