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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은 대통령 고도의 정치 행위다.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정해진 형벌의 효력을 무력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국민공감’과 ‘당사자 반성’ 등을 고려해 대통령이 결단을 내리는 사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면의 전제 조건 중 하나로 국민적 공감대를 꼽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대체로 우호적인 분위기다. 최근 현대리서치가 조사한 국민 여론은 사면·가석방 찬성 의견이 68.8%로 반대 의견(27%)보다 많다. 기존 여론조사에도 줄곧 찬성 의견이 우세했다.
다만 시민단체나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재벌에 대한 특혜라는 비판이 거세다는 게 부담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 부회장이 가석방 심사 대상자 명단에 포함됐다는 보도에 “문 대통령은 중대경제범죄자에 대해서는 무관용의 원칙을 세우고 사면권도 엄격히 제한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했었다”며 “심사 대상에서 즉각 배제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인 공정경제의 틀을 무너트린다는 지적이다.
그는 경영권 승계 논란과 관련해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며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무노조 경영과 관련해 이 부회장은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란 평가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노동 3권을 철저히 보장하겠다”고 강조했다. 이후 삼성생명, 삼성화재에 복수노조 체제가 생겼고, 삼성전기도 노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해 말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최후 진술 자리에서는 “회사의 성장은 기본, 부당한 압력에 거부할 수 있는 준법감시제도를 만들겠다”, “삼성을 준법을 넘어 최고 수준 투명성과 도덕성을 갖춘 회사로 만드는 것을 제가 책임지고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기존의 삼성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기존 경영방식에서 벗어난 달라진 삼성의 의사결정구조, 지배구조 등을 어떻게 구현할지 선언이 있을 줄 알았지만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며 “다른 그룹과 달리 삼성은 적절한 타임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는 게 변수”라고 귀띔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등기이사에 오르자마자 국정농단 시비에 휘말리면서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총수의 역할을 제대로 할 기회가 없었고, 옥중에서 할 수 있는 카드는 제한적이었다”며 “이미 수차례 대국민 약속을 했던 만큼 이전 삼성과 다른 길을 가는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지 않겠느냐”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