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살이가 힘든 건 그 공간적인 불편함만큼 사라지지 않는 습기의 불쾌함 역시 컸다. 햇볕이 거의 들어오지 않으니 빨래를 해서 널어도 잘 마르지 않았고, 마른 후에도 습기가 머금은 갖가지 냄새들이 옷에 배기 마련이었다. <기생충>에서 박사장(이선균)이 운전기사로 일하게 된 기택의 몸에 밴 냄새를 척 알아채고 “이게 무슨 냄새지?”하고 묻는 장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 유독 컸기 때문이었다. 마치 세상은 민주화되었고 그래서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는 걸 바로 그 냄새가 증명해내고 있어서였다. 빈부에 따라 사는 공간이 달라지고, 그래서 그 공간의 냄새를 머금은 사람들은 선을 넘을 수 없는 어떤 보이지 않는 경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반지하에서 살 때 옆방에 살아서 친해진 이웃 청년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도 우리는 아무런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같은 냄새를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마른 체구에 얼굴색이 검었던 이웃 청년은 그것이 햇빛을 잘 보지 못해서라고 했다. 새벽까지 술집에서 일했기 때문이었다. 술을 관리하고 내주는 일을 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거의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아침 즈음에 들어와 해장을 하고 낮 내내 잠을 자기 일쑤였다. 그러니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일하러 나가는 그가 햇빛을 볼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는 낮에 자는 일 때문에 반지하가 자기에게는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그나마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거였다. 같은 반지하에 살고 있었지만 그 청년의 삶은 사실상 빛 볼 일 없는 지하 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지하실 남자에서 이 청년의 얼굴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다.
<기생충>에서 갑작스런 폭우로 여행을 떠났던 박사장네가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그 저택이 마치 자기 집인 양 술 마시고 놀던 기택의 가족이 어두운 상 밑으로 숨는 장면에서 빵 터진 이유도 그 때의 그 경험 때문이었다. 슬금슬금 그 곳을 빠져나와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뚫고 저지대에 있어 물이 차오르고 있는 반지하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기택네 가족의 모습은 마치 바퀴벌레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고, 그들이 다시 돌아간 자신들의 반지하 집에 차오르는 물은 잠시간 “이것도 살만해”라고 여겼던 그들의 판타지를 현실로 되돌려놓는 것이었다.
최근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한 빌라 반지하가 침수돼 일가족 3명이 사망한 사건은 <기생충>의 이야기가 그저 영화적 허구만은 아닌 현실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물론 너무 빠른 순간에 불어난 물 때문에 벌어진 참변이긴 하지만, 과연 반지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주거 공간(물론 지하를 포함해서)이 과연 정상적인 삶의 공간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애초 반지하는 박정희 정부시절 북한의 공습이나 시가전에 대비하기 위한 지하 공간을 의무화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가난한 이주자들이 반지하를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이 반지하 주거문제를 환기시키며 잠깐 그 대책 논의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 바 있지만, 그 때뿐 실질적 대책은 여전히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도 잠시 반지하 주거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가 유야무야 사라진다면 갈수록 기상이변으로 인한 재난 위험이 높아지고 있는 현재 또 다른 비극이 이어질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그 삶이 어떠한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택의 냄새를 이해하지 못하는 박사장의 시선으로는 이 문제가 그저 선 바깥에 놓인 ‘저들의 문제’ 정도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대책은 바로 그 선을 넘어 들여다보려는 자세에서 시작된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