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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해지 보험 해지율 추정 방식을 두고 금융당국과 보험사 간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제4차 보험개혁회의를 통해 원칙 모형을 적용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다만 엄격한 조건을 달고 다른 예외 모형을 적용할 길을 열어뒀다. 하지만 나흘 뒤인 지난달 11일 금감원은 보험사, 회계법인 경영진과 만나 예외 모형을 택하면 내년 집중 검사 대상으로 삼고 대주주 면담까지 하겠다며 압박했다. 사실상 당국안 만을 허용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다.
무·저해지보험은 같은 보장을 담보하는 보험이더라도 보험료가 10~40%가량 저렴하다. 대신 중도에 해지하면 환급금을 아예 주지 않거나 덜 준다. 다만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출시한 상품이라 제대로 된 해지율을 가정하기 어렵다. 금융당국은 보험사가 이를 악용해 해당 상품의 해지율을 자의적으로 설정, 실적을 부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험사가 해당 상품을 해지할 가능성을 실제보다 높게 잡은 뒤 앞으로 지급해야 할 보험금을 낮추는 회계 방식으로 이익을 과도하게 잡았다는 것이다. 당국은 지금보다 해당 상품 해지율을 40%가량 낮게 가정하라며 이를 반영한 ‘원칙 모형’을 제시한 상태다.
무·저해지 상품에 대한 해지율 값을 바꾸면 보험사가 보유한 보험계약서비스마진(CSM) 잔액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CSM은 보험사가 보험계약을 통해 미래에 얻을 것으로 예상하는 이익의 현재 가치를 의미한다. 보험사 핵심 이익지표로 활용된다. 해지율 값을 변경하면 보험사가 보유한 CSM 잔액은 많게는 5% 이상 감소할 것으로 추산한다.
실제 이달 보험개혁회의 신회계제도반의 지침 전달 후 예외 모형 적용을 위해 회계법인에 검토작업을 의뢰했던 보험사 대부분은 검토 작업을 중단했다. 보험사 한 관계자는 “회계법인 측에서 당국 지침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받아오지 않으면 검토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해 작업을 일시 중단한 상황이다”며 “이러한 지침은 결국 구체적인 감독 규정이기 때문에 예외 모형 적용의 정합성을 검토할 이유가 없다는 게 회계법인의 설명이었다”고 말했다.
남상욱 서원대 경영학부 교수는 “보험사가 해지율을 지나치게 높게(낙관적으로) 보면 나중에는 결국 보험사 스스로 타격을 입게 돼 있다”며 “시대가 달라진 만큼 보험사에도 상품 설계·판매에 있어 자율권을 일부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되 보험사가 자체적으로 보완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허용할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말 뿐인 경과조치…신청받아줄지 미지수
경과조치는 부채평가 방식이 기존 원가에서 시가로 변경됨에 따라 K-ICS 비율의 안정적인 정착을 지원하고자 마련한 제도다. 시가평가로 부채가 늘어남에 따라 K-ICS 비율이 안정적인 수준에 이를 때까지 신규 위험액을 단계적으로 늘리는 조치다. K-ICS 비율은 보험계약자 모두가 보험금을 청구했을 때(요구자본),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는지(가용자본) 판단하는 지표다. 가용자본이 많을수록(분자), 요구자본이 적을수록(분모) 건전성 비율은 상승한다.
이 원장의 언급 이후 상당수 보험사가 경과조치를 검토하고 있으나 정작 당국 내에선 경과조치와 관련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장 올해 회계를 마무리해야 할 보험사로서는 해를 넘기기 전에 경과조치를 신청해 조금이나마 자본건전성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하지만 미동조차 없는 당국에 애만 태우고 있다. 보험사 한 관계자는 “이 원장의 경과조치 발언 이후 신속한 후속 조치를 기대했으나 금감원 인사 등이 맞물리면서 경과조치 신청은 내년 상반기에나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또 다른 보험사 관계자는 “보험사는 주식·금리 위험(리스크) 때문에 경과조치에 요구가 크다. 당국에선 가용자본에 대한 경과조치 외엔 의지가 없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관계자는 “내년 1~2월 중 신청 여부 등을 결정할 것”이라며 “보험사가 신청하면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