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 중앙은행 미덕? 구로다에만 인색한 이유는[김보겸의 일본in]

구로다가 어떤 말 해도 거짓말로 해석하는 시장
아무리 '경제는 심리'라 해도…효과 없으면 수정해야
"거짓말 계속 고집하면 시장이 당국 말 안 믿어"
일본 경제가 처한 위험 제대로 설명 못 하는 위험도
  • 등록 2023-01-25 오전 7:20:09

    수정 2023-01-25 오전 7:20:09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중앙은행 총재의 미덕은 거짓말이라고들 한다. 헨리 키신저 미국 전 국무장관이 외교 기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쓴 ‘건설적인 모호함(constructive ambiguity)’은 중앙은행에서도 여러 번 사용됐다. 지난해 10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에서 “직설적이지 않고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점은 중앙은행원의 미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중국과의 외교에서 ‘건설적 모호함’을 사용하며 20세기 최고의 외교 전략가로 인정받는 헨리 키신저 미국 전 국무장관(왼쪽). 지난 1971년 중국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전 중국 총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AFP)


최근 ‘중앙은행 총재다운 미덕’으로 주목받는 인물은 일본은행의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시장은 거짓말로 받아들여 거꾸로 해석하고 있어서다. 지난 18일 구로다 총재는 통화정책회의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10년물 국채금리를 제로에 가깝게 유지하는 국채수익률곡선(YCC)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이르면 3월 회의 때 YCC를 포기할 것으로 본다.

심지어는 일본은행 내부에서도 구로다 총재가 퇴임하는 4월 이후 YCC 폐지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수장이 계속 유지한다고 못 박았는데도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20일 10년물 국채 금리 변동 폭을 0.5%로 올리면서 “완화 축소는 아니다”는 구로다 설명에도 일본 언론들은 입을 모아 “사실상 금리 인상”이라고 해석했다.

구로다 총재가 양치기 소년을 자처한 측면도 있다. 과거 “장기금리 한도 인상은 금리 인상”이라며 신중하던 그가 “금리 인상이 아니라 완화정책의 지속성을 높이는 것”이라며 정반대 설명을 한 탓. 이 때문에 격한 반응도 나온다. 한 일본은행 원로 관계자는 “국민을 바보 취급한 설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사진=AFP)


“일본은행, 거짓말 고집하다 경제 위험 놓쳐”

왜 시장은 구로다 총재의 ‘거짓말’에 엄격할까. 아무리 경제는 심리라 하더라도, 일본은행이 의도한 효과(2% 인플레 달성)가 안 나타나면 적절하게 정책을 수정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밀어붙여 비용만 엄청나게 키워 버렸다는 비판이 거세다. 실제 일본은행이 10년간 초완화 정책을 폈지만 의도했던 투자 및 소비진작 효과에선 낙제 평가를 받았다.

시장에서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것 말고도 구로다 총재의 거짓말은 문제를 키운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심리를 압박해 경제를 움직이려는 정책 당국자들에게 약간의 거짓말은 따르기 마련”이라면서도 “정책당국이 거짓말을 필요악으로 규정하고 계속 고집한다면 당국자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게 된다”고 짚었다.

더 큰 문제는 일본 경제가 처한 진정한 위험을 일본은행이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닛케이는 “일본 경제는 늘어난 채무로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완화 효과를 믿고 싶은 일본은행이 부작용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중앙은행 신뢰 차원에서 훨씬 심각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실제 일본은행이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장기채권 금리 상한을 0.5%로 유지하기 위해 지난달 일본은행은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약 6%를 채권 매입에 투입했다. 이 속도로 일본은행이 일본 국채를 계속 사들이면 일본은행 지분이 올해 중순에는 60%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토호루 사사키 JP모건 외환 스트래티지스트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장기금리를 낮추기 위한 것이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불분명하다”며 “YCC를 오래 유지할수록 이 수렁에서 벗어날 방법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쁜 엔저’로 인한 자본 유출도 골칫거리다. 재무성도 이례적으로 엔 매수·달러 매도에 동참하고 있다. 재무성 고위관계자는 일본은행에 “구로다 총재가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것이냐”라며 물밑에서 완화정책 수정을 요구해 왔다고 닛케이는 전했다.

P. S. 사실 중앙은행의 모호함이 미덕이 아니게 된 건 이미 25년 전 예고된 일일지 모른다. 지난 1998년 일본은행 내부 임원으로 구성된 ‘원탁회의’를 없애고 일본은행은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정책을 논의하고 의사를 결정하기로 했다. 논의된 사항은 한 달 안에 공개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더는 한 나라의 금융정책이 국경 울타리 안에서만 통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판단에서다. 중앙은행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실현하려면 시장 참가자들에게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효율적인 작동 방식이라는 사실, 비단 일본에만 유효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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