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청출어람.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었다. BL(Boys Love·남성 동성애) 종주국 일본에서 영감 받은 태국 BL물이 일본 열도에서 질주한다. 도쿄에 위치한 타워레코드 시부야점 2층 카페는 사랑에 빠진 두 남학생 이야기를 다룬 태국 드라마 ‘보이프렌즈(2gether the series)’를 테마로 하고 있다. 방문객은 모두 여성. 카페를 찾은 한 여성 팬은 “태국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며 태국어 공부도 시작했다고.
| 태국 BL 드라마 ‘보이프렌즈’.(사진=보이프렌즈) |
|
태국 게이 드라마가 차세대 K팝이 될 수 있다고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전망했다. BL 종주국 일본의 스토리라인과 K팝의 성공요인을 합친 게 지금의 태국 BL물이라는 설명이다.
BL 혹은 ‘야오이(야마나시(やまなし)·오치나시(おちなし)·이미나시(いみなし)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로 갈등·결말·의미가 없는 남성 간 로맨스물, Y시리즈라고도 함)’로 불리는 게이 드라마가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몰이다. 유튜브를 타고 태국 밖에서도 팬들을 양산하는 중이다.
일본이 그 중에서도 주요 소비시장이다. 일본 소셜미디어(SNS)에서는 ‘태국에 중독됐다’는 뜻의 ‘타이 누마(태국 늪)’ 키워드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지난 2016년 태국 관광청은 일본 오사카에서 국제무역박람회에서 ‘태국 BL’ 부스를 설치하고 콘텐츠를 홍보했는데, 이 때 확보한 외국인 투자 자금은 자그마치 3억6000만바트. 약 136억6560만원어치다.
화려한 역수입인 셈이다. BL물은 애초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일본 만화의 스토리라인이 원조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짚었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태국을 연구하는 이시카와는 “BL물에서는 질투심을 느끼게 할 여자주인공이 없다”며 “성소수자 여성들도 로맨스물을 통해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며 일본에서의 BL물 인기 요인을 분석했다. 물론 직관적인 반응도 있다. “잘생긴 남자 두 명이 같이 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 자체가 눈호강(타카바야시 오토하·20)”이라는 평가처럼.
무엇보다 태국 BL이 ‘넥스트 K팝’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태국 BL물 제작자들이 꽃미남 스타일의 K팝 스타들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모습에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BL물로 파생되는 수익을 늘리기 위해 팬미팅을 여는 등 팬서비스를 활용하는 K팝 비즈니스 모델도 공격적으로 가져다 쓴다. 태국 탐마삿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의 푸윈 연구원은 “태국 BL은 일본과 한국 재료가 섞인 멜팅 팟”이라고 빗댔다.
| 태국 BL 드라마 ‘보이프렌즈’.(사진=보이프렌즈) |
|
게이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겁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태국 BL물 팬 중 20% 이상이 게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게이 메카로 통하는 방콕의 명성에도 불구, 여전히 태국 내 게이 차별을 다루는 스토리가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등 주제도 다양해지고 있다. 푸윈 교수는 “요새 들어서야 공공장소에서 대형 광고에 BL 커플이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라고 짚었다.
태국 BL물 제작자들이 마냥 이 현상을 반기는 건 아니다. 이코노미스트는 “BL은 태국의 소프트파워 잠재력을 보여주는 분야이지만, 정부가 홍보할 때는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실제 태국에선 아직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지 않았다. 지난해 6월 동성 커플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시민결합법을 승인하긴 했지만, 법적으로 결혼한 커플과 완전히 같은 권리를 주는 건 아니다. 지난 2007년에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BL물을 일시적으로 금지한 전례도 있다. BL물이 더 양지화할 경우 또다시 제동을 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태국에 BL물은 있지만 게이 권리는 없다”는 한탄마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