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응열 기자] 미국의 대(對)중국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출 통제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예기치 못한 암초로 떠올랐다. 인공지능(AI)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까지 규제 대상에 묶인다면, 중국 수출용 AI 가속기에는 HBM 탑재가 불가능해지는 만큼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美, 대중국 HBM 수출 통제 검토1일 업계에 따르면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메모리 기업들이 중국 기업에 HBM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규제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AI 메모리와 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미국 행정부가 수출 통제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규제에는 HBM2와 HBM3 등을 비롯해 현재 시장 주력 제품인 HBM3E까지 포함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HBM 수출 통제를 이르면 이달 후반께 공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직접적인 대중국 HBM 판매 외에 AI 가속기에 딸린 HBM까지 규제 대상이 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AI 가속기를 통한 간접적인 HBM 수출까지 포함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많다. 직접 판매만 막는다면 규제 실효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HBM은 주로 AI 가속기 탑재용으로 쓰인다. AI 가속기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회사가 미국 엔비디아다.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열린 엔비디아 주최 연례 개발자 회의 ‘GTC 2024’에 참석해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 블랙웰(제품명 B200)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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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가속기 딸린 HBM도 규제 영향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규제가 확정되지 않았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AI 가속기용 HBM이 규제 대상에 오른다면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모두 엔비디아에 4세대 HBM3를 공급하고 있고, SK하이닉스는 5세대 HBM3E도 납품하고 있다. 그나마 SK하이닉스는 사정이 낫다. SK하이닉스의 HBM3는 엔비디아 데이터센터 그래픽처리장치(GPU) 기반 AI 가속기 H100에 쓰이는데, H100은 이미 중국 수출길이 막혀 있다. SK하이닉스 HBM3E는 엔비디아 주력 칩인 H200에 들어간다. H200은 H100 다음 세대 제품이다.
| 삼성전자 HBM3. (사진=삼성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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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보다 영향이 클 전망이다. 최근 퀄 테스트(품질 검증)를 통과한 삼성전자 HBM3는 엔비디아의 중국 수출용 저사양 AI칩 H20에 들어간다. 엔비디아는 자칫 중국향 AI 가속기에 HBM이 아닌 다른 메모리를 써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뒤늦게 엔비디아 공급망에 들어간 삼성전자로선 시작부터 난관에 직면하는 셈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HBM을 사용한 AI 가속기는 군사용으로 쓸 경우 위협적일 수 있다”며 “미국의 대중국 HBM 통제는 이미 예견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HBM을 개발하려는 상황을 감안하면 그 전에 삼성전자가 HBM3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HBM3서 차차 신뢰 쌓아야 하는데…”
삼성전자 입장에서 이는 HBM4 등 차세대 제품 수주에서도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H20은 AI향 메모리로 부상하기 시작한 HBM3에서 삼성 제품이 실제 산업 현장에 쓰일 경우 안정적으로 동작하는지 테스트할 수 있는 무대다. 아울러 두 회사가 ‘HBM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미국 규제로 삼성 HBM3 수요가 줄어들면 HBM 협력 강화가 원활하지 않아질 수 있다.
이규복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연구부원장은 “H20은 삼성 HBM3가 현장에서 잘 작동하는지 볼 수 있는 시험대이자 엔비디아와 삼성전자간 신뢰관계를 쌓을 수 있는 초석”이라며 “AI 가속기에 딸린 HBM까지 규제 대상이 되면 두 회사의 HBM 협력 관계 강화에 다소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삼성전자로서는 향후 HBM 로드맵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전경. (사진=삼성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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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HBM 수출 통제가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은 단기적으로는 작을 것으로 보인다. AI 가속기 수요 폭발로 HBM이 수혜를 가장 크게 누리고 있지만, 저전력 LPDDR와 그래픽용 GDDR, 낸드플래시 기반 저장장치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SSD) 등 다양한 메모리로 AI 효과가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HBM 판매가 줄더라도 다른 메모리가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HBM 효과가 크지 않았던 올해 2분기에 DDR5, SSD 등을 앞세워 반도체 사업을 통해서만 6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올렸다. 당초 시장 예상을 웃도는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HBM 수출 통제 내용은 최종 발표를 봐야 영향을 면밀히 살필 수 있을 것”이라며 “HBM이 규제 대상이 되더라도 AI로 인한 반도체 호황은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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