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과 무능의 파노라마. 구조조정 실무라인은 오작동이다. 지휘관은 푯대를 향해 ‘진격 앞으로’를 외치지만 전사들은 좌고우면이다. 극도로 몸을 사리며 정해진 메뉴얼에 따라 면피의 기술을 동원하는데 급급하다. 국책은행도 금융감독원도 금융위원회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무기력의 팽배, 복지부동, 형식주의의 만연. 변양호신드롬의 확장판이다.
“몸바쳐 일하는 후배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 사석에서 만난 변양호는 일갈한다. 이미 공직사회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미루는 건 보신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선의에 따라 최선의 결정을 내려도 후일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린 결정의 잣대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용되는 법. 검찰 수사도 감사원 감사도 국회 청문회도 모두 예측 불가능하다.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정조준된 책임의 화살은 피할 길 없다.
구조조정은 결단의 과정이다. 부실기업 매각과정은 단적인 예다. 채권단간 이해관계가 제 각각인 상황에서 채무재조정, 신규자금 투입, 제3자 매각 등 일련의 과정은 순간순간 책임 있는 결단을 요구한다. 최선의 결정을 내려도 헐값매각, 특혜시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책 결정에 대한 감사는 면책의 불문율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곧 예측 가능한 감사다. 그래야 사후 책임의 압박에서 벗어나 복잡한 구조조정의 실타래를 풀어나갈 수 있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면책은 책임체계의 명확한 정립을 전제로 한다.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가 원활히 작동할때 이뤄진다. 그 배후에는 공적 신인도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있다. 위기 대응과정에서 각종 선택의 결과에 대해 포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트루먼의 모토, 이후 미국의 대통령들이 지침으로 삼았던 바로 그 메시지다.
나라 전체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정치적으로 인기 없는 결정을 내리는 일은 물론 녹록지 않다. 그러나 끊임 없이 밀려오는 선택의 순간에 책임 있는 리더의 분명한 언명이 없으면 참혹한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공직사회를 움직이기 어렵다. 험난한 구조조정의 여정에서 사즉생의 결기는 바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리더의 분명한 메시지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