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 만능주의…하루 3건씩 '날림규제’법안 쌓인다

20대 국회 의원입법, 의원1인당 45건
매일 규제법안 3건, 규제 5건씩 양산
대통령 직접 규제혁파 호소에도
재벌 타깃규제 등 규제법안 양산
정부입법과 같은 규제심사절차 미흡
美·英은 의회내 규제심사기구 도입
입법권 남용 막기 위한 제도화 절실
  • 등록 2018-08-22 오전 5:31:00

    수정 2018-08-22 오전 5:31:00

[이데일리 송길호 기자] 외국계 은행의 한 임원은 요즘 국회 정무위원회 이학영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발의한 ‘은행법 일부 개정안’의 처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외국은행 국내지점의 자산을 규제하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원활한 사업재편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씨티은행 국내지점의 구조조정처럼) 외국은행 지점의 급격한 구조조정을 막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며 “자칫 은행 고유의 경영상 판단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부적으로 심각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입법홍수 속에 규제 사슬 퍼진다

이슈만 터지면 모두 규제로 풀려는 건 단선적인 접근법이다. 무분별한 의원입법은 이 같은 규제만능주의의 극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원입법은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된 이후 입법부 우위 체제가 확립되면서 양산되고 있다. 김영삼정부에서 김대중정부로 넘어가는 15대 국회(1996∼2000년)만해도 의원발의 법안은 1144건. 의원 1인당 3∼4건에 불과했다. 이후 18대 국회(1만2220건)에서 1만건을 훌쩍 넘어서더니 19대 국회에서 1만6729건을 찍었다. 2016년 6월 개원한 20대 국회에선 20일 현재 1만3704건(의원 1인당 45건)으로 정부 발의 법안(763건)의 18배에 이른다.

하지만 의원 발의 법안이 원안이나 수정안의 형식으로 통과되거나 대안 법률을 통해 현실화된 비율은 19대 국회를 기준으로 34.6%에 그친다. 가결률(원안이나 수정안이 통과된 비율)만 따로 보면 14.4%다. 이 기간 정부발의 법안의 73.5%가 법률에 반영됐고 가결률도 34.7%라는 점을 감안하면 의원입법의 현실화 가능성은 정부법안의 절반을 밑도는 셈이다.

문제는 이들 법안이 양산해내는 각종 규제다. 무분별한 입법홍수속에 불필요한 규제의 그물망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20대 국회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규제개혁위원회 분석에 따르면 19대 국회 4년간 발의된 1만6729개 의원입법중 규제법안은 1335건(8%), 20대 국회에선 1만3704개 의원법안중 2391건(17.4%)에 달한다.

여권이 재벌개혁 등을 명분으로 각종 규제법안을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국회 정무위원회 박용진(더불어민주당)의원이 대표발의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재벌 총수일가의 주총안건에 대한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은 그 단적인 예다.

국회 입법, 견제장치가 없다

의원발의 법안이 규제입법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은 건 정부입법과 같은 엄격한 규제심사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법을 만들기 위해선 관계부처 협의와 당정협의, 입법예고·공청회를 거쳐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후 법제처심사· 차관회의와 국무회의 등 다다계의 필터링을 거쳐야 국회로 법안을 넘길 수 있다. 규개위 심사와는 별도로 부처 내에서는 규제의 시급성이나 필요성 타당성 등을 기준으로 자체적으로 규제영향분석을 하기도 한다.

반면 의원법안은 10인 이상 의원의 찬성으로 발의되고 국회 내 법제실 검토만 거치면 상임위로 상정된다. 해당 법안의 비용산정은 국회예산정책처의 비용추계서를 첨부하면 된다. 정부입법은 ‘예산비용 추계서’와 ‘재원조달 방안’제출이 의무화돼 있지만 의원법안에는 재원조달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공청회도 국회법 규정에 ‘상임위 의결로 생략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 있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당의 A보좌관은 “법안의 골격을 짜서 대략 넘겨주면 법제실 국회 공무원들이 이를 검토하고 체계를 잡아준다”며 “제정입법이나 예산안 부수법안이 아니면 법률 개정안은 손쉽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번거로운 규제심사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의원입법을 활용하면서 청부입법 우회입법이 난무하고 있다. 동일한 내용이라도 의원입법 형식을 취하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의원들로서도 의원입법 발의실적을 의정활동의 선전도구로 활용한다. 여당의 B 보좌관은 “시민단체 등에서 의정활동을 평가할때 법안발의 등 양적 평가에 치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이해관계자가 첨예하게 갈리는 법안이나 쟁점이 있는 법안이라도 통과여부는 뒷전이고 일단 발의해놓고 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법안의 내용도 모른 채 의원들끼리 ‘품앗이’ 하듯 공동발의를 통해 입법 건수를 늘리는 눈가리고 아웅식 실적 경쟁이 속출한다. 주요 이슈가 터질 때마다 엇비슷한 법안이 무더기로 발의되고 불필요한 규제사슬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은 이렇게 마련된다. 야당의 C 보좌관은 “일부 의원은 자신들이 발의한 법안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도장을 찍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의원입법, 규제심사 의무화해야

무분별한 의원입법이 각종 규제의 올가미를 드리우면서 국가 전체의 규제개혁 전선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국내 규제정책 관련 보고서를 통해 “의원입법에 대한 규제품질관리가 제도적으로 미흡하다”고 지적한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전문가들은 국회의 입법권 남용을 막고 규제의 품질관리를 위해선 결국 의원입법에 대해서도 규제영향평가 등 규제심사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바른미래당이 비합리적인 규제를 남발하지 않기 위해 의원입법에 대해 사전 심사절차를 도입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여당과 제1야당은 여전히 미온적이다. 의원입법에 재원조달 방안을 포함하는 ‘페이고(pay-go)법안’도 이미 발의된 상태지만 국회 입법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논의에 진전은 없다.

미국 영국 등 주요 선진국은 의회에 별도의 규제심사기관을 설치, 규제개혁을 위한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미국의 의회감사원(GAO)이나 영국의 규제개혁전담위원회 등은 의회내 독립적이며 전문적인 규제개혁기구들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제되지 않은 입법이 난무하면서 불합리한 규제가 속출하고 있다”며 “규제관련 이슈가 있는 법안에 대해선 전문가집단이나 별도의 기구를 통해 사전통제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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