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호의 Intuition] '케첩'에 빠진 국가채무

  • 등록 2010-10-06 오전 10:01:24

    수정 2011-08-23 오후 8:54:47

[이데일리 경제부 팀장]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의 유진 파마(Eugene Fama)교수는 지난 2007년 한 계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주택시장의 버블가능성을 가볍게 일축한다. 사람들은 주택을 매입할때 일반적인 주택시세에 근거해 잠재가격을 결정하는 만큼 시장에서 나타나는 주택가격은 모두 합리적이라는 거다. 주택시장 자체의 펀더멘틀(기초체력)이 튼튼한지 그래서 전반적인 가격은 제대로 형성됐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는 도외시한 채 주택간 상대가격을 통해 가격의 적정성을 판단하는 이 같은 논리를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는 그의 베스트셀러 '비이성적 거품(Irrational Exuberance)'에서 ‘케첩 경제학(Ketchup economics)’이라고 비꼰다.

케첩 경제학이란 용어는 미국 재무장관과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로렌스 서머스(Lawrence H. Summers) 백악관 경제위원회(NEC)위원장이 지난 1985년 한 유명 저널에 게재한 논문에서 유래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케첩시장을 분석할 때 일반 경제학자들은 케첩가격을 결정하는 토마토, 대체재, 노동비용, 소비자의 소득 등 수요와 공급 요인에 대해 입체적으로 접근하는 반면 케첩 경제학자들은 ‘2쿼트병의 케첩 가격이 1쿼트병 케첩가격의 두배일 경우 케첩시장은 효율적’이라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며 케첩 경제학자들로 지칭되는 재무학자들의 연구방법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가격을 결정하는 근본 요인에 대한 고찰 없이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상대가격간 비교를 통해 해당 가격이 적절한지, 시장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 판단하는 케첩 경제학의 접근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불행히도 이같은 단순비교, 이른바 케첩 경제학의 논리를 즐겨 활용하는 집단이 우리의 경제관료들이다. 국가채무의 적정성에 대한 그들의 논리전개 방식이 대표적이다. 지난 10여년간 국가채무의 위험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보음에 대해 경제관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반박 논리는 선진국과의 상대비교였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채무 증가속도가 심상치 않다고 끊임없이 지적해도, 공식 국가채무 외에 공기업부채와 같은 잠재 부채를 포함해 재정전략을 설계해야 한다고 경고해도 그들이 내세우는 한결 같은 논리는 "국제기준상 문제 없다”는 거다.

겉으로 보면 이 같은 논리 전개방식은 그럴 듯 해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집계방식을 기준으로 2009년 현재 우리나라 전체 경제규모에서 나라빚이 차지하는 비중(국가채무/GDP)은 32.6%로 OECD회원국 전체 평균(53.8%)보다 20%포인트 이상 낮다. 미국(53.1%), 일본(192.9%)과 비교해도 끄떡없고 주요 20개국(G20)과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도 우리의 통계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예쁘게 나온다. 케첩 경제학을 원용한 관료들의 논리는 통계의 마법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0여년간 이 같은 논리가 팽배하다 보니 '재정건전성을 고려할땐 공기업부채나 정부보증채무 등 공공 부문 전체의 부채를 고려해야 한다'든지 '고령화, 국민연금 고갈, 통일재원 마련 등 향후 재정부담을 감안해야 한다’는지 국내 경제현실에 내재한 특수한 사정을 내세우는 논리는 관료들에겐 '국제기준에서 벗어난 정략적이고 무리한 논리전개방식'으로 치부돼 왔다. 지난 2006년 변양균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이 이 같은 논리를 통해 국가채무의 위험성을 경고한 언론매체에 대해 "국가 기본질서를 훼손한다"며 공식적으로 비아냥댈 정도였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이 같은 상대비교의 함정은 관료들에겐 마치 '마법의 주술'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케첩 경제학의 비유에서 드러나듯 국제기준에 근거한 상대비교의 논리는 분명 현상을 왜곡하게 된다. 직관적으로 보더라도 비교대상이 되는 국가들의 재정건전성 자체에 대한 분석 없이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괜찮다고 우리의 재정이 안전하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선진국들은 경제의 펀더멘틀도 국가신인도도 우리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대비교를 통한 논리전개 방식은 무리가 있다.

선진국들은 더욱이 성장단계를 넘어 이미 경제체질이 구조화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국민소득 2만달러 언저리에서 맴돌며 선진국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한 우리나라로선 이미 수십년전 선진국 반열에 오른 국가들과의 평면적인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이제 20대에 접어든 청년의 콜레스트롤 수치가 40대가 넘은 중장년층의 콜레스트롤 수치보다 상대적으로 낮다고 그 청년이 건강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더욱 큰 문제는 정부가 내세우는 국제기준 또한 명확하지 않다는 거다.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 등 미래의 연금부채는 국제기준상으로는 물론 국가채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특수하게 연금재정 적자를 일반회계에서 보전하도록 각 연금법이 규정하고 있다. 이들 연금이 고갈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만큼 미래의 암묵적인 채무(implicit debt)라고 볼 수 있다.

공기업 부채도 국제기준상으로는 국가채무가 아니지만 유사한 논리가 적용된다. OECD 기준으로 공기업은 사실상 상업적 활동에 종사하는 기관으로 정부의 지시와 통제로 정책사업을 담당하는 우리나라의 공기업과는 성격이 다르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공기업은 국제기준으로는 준정부기관에 가까워 공기업 부채는 OECD 기준으로 보면 국가채무에 포함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재정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해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이나 무디스, S&P 등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뒤늦게 우리나라 공기업 부채의 위험성을 일제히 경고하고 나선 것은 모두 이 같은 논리가 녹아 들어 있다.

국가채무의 질에 대한 고찰 보다는 다른 나라와의 양적 비교를 통한 논리전개방식, 케첩 경제학의 논리를 빼다박은 단순 상대비교의 함정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논리의 허점을 몰랐다면 능력이 없는 거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국민들을 기만하는 거다.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선 정치인의 포퓰리즘부터 도마위에 올려야 겠지만 정권의 이익에 편승해 사실관계를 호도한 경제관료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며칠 전 기획재정부는 2011년도 예산안에서 자금난을 겪고 있는 LH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에 대해 3년간 3조30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공식 국가채무의 3분의 1, 그러나 통계상으로는 국가채무로 잡히지 않던 118조원에 달하는 LH공사의 빚더미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들의 혈세가 동원되기 시작한 셈이다. 공기업부채가 늘어나면 잠재적인 국가부채의 위험성은 높아지고 추가적인 금융비용 발생으로 국민들에게 더 큰 부담을 떠안기게 될 것이라는 우려는 이번 LH지원을 통해 현실화하고 있다.

상대비교의 함정에 빠져 부동산 버블은 없다던 유진 파마 교수처럼 공기업부채는 국가채무에 포함되지 않는다던 우리의 경제관료들도 머쓱하게 됐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리 큰 걱정은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문제가 불거지면 이런 저런 논리 끌어들여 다시 봉합하면 되고 더욱 심각해지면 ‘남의 돈’으로 생색내며 빚잔치하면 그만일 테니. 나라살림 꼼꼼히 챙기지 않은 무책임한 관료들이 남기고 간 빈 자리엔 결국 부실 덩어리만 잔뜩 남아 국민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내 돈’ 직접 들여 이 '부실의 덫'에 메스를 들이 대야 할 국민들만 이래저래 피곤하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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