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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통토크] ① 김도진 "전국 지점 650곳 불시에 방문…직원들과 점심 나누며 소통할 것"
- 김도진 기업은행장이 지난 13일 서울 중구 을지로 기업은행 본사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데일리 노진환 기자] ‘待人春風 持己秋霜’(대인춘풍 지기추상·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자신을 대할 때에는 가을 서리처럼 해라) ‘人無遠慮 必有近憂’(인무원려 필유근우·사람이 멀리까지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이 생긴다)김도진 IBK기업은행장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적혀 있는 사자성어다. 지난달 말 취임한 김 행장의 마음가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문구다. 젊은시절부터 김 행장의 좌우명이었던 ‘지기추상’은 입행 32년 만에 행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 “행장까지 오른 건 몸에 밴 성실함 덕분”김 행장은 지난 13일 서울 중구 을지로 기업은행 본사에서 진행한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1만3000명의 기업은행 직원을 이끌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깨가 무겁다”며 “늘 내 자신에게는 서리처럼 대하자고 다짐하는데 잘 지켜지는 지는 모르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행장 취임 후 2주간 책임감에 제대로 잠을 못 자 벌써 몸무게가 3kg 빠졌다고 했다. 실제 서리 대하듯 김 행장은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술을 많이 마셔도 매일 새벽 5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고 7시에는 출근해 자리에 앉는다. 행원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남들보다 빨리 출근해 먼저 일을 시작하면 출발선에서 한발 앞서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김 행장은 “행원 땐 지점장만 돼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행장까지 된 것은 아마 성실하게 생활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일이 있으면 늦게 퇴근하기도 하고 야간이나 주말에도 일했다”며 일중독자(워커홀릭)의 면모를 드러냈다.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부드럽다. 김 행장의 친화력과 소통능력은 ‘대인춘풍’에서 나오는 것 같다. 행장 인선 과정에서 노동조합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인선이 확정되자마자 노조를 찾아 함께 잘 해보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명절 때마다 부하직원에게 선물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집사람이 선물하라고 사준 것”이라며 건네지만, 풀어보면 부하직원마다 색상과 종류가 달라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는 후문이다. 소탈한 성격도 그의 장점이다. 지점장, 본점 부장, 본부장에 이어 부행장에 올라서도 직원에게 격의 없이 다가가 “오늘 소주 한잔하자”며 소위 ‘번개’를 치곤 했다. 행장이 된 지금도 비슷한 행보를 이어갈 생각이다. 김 행장은 “임기 내에 전국 기업은행 650개 지점을 모두 돌아볼 것”이라며 “공식적으로 방문해 회의석 상에 지점장과 직원을 불러모아 보고를 받으면 뻔한 얘기만 할 테니 불시에 방문해 점심 약속 없는 직원을 모아 밥 사주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듣겠다”고 말했다. ◇14년 써온 조직편제...행장 되기 전까지 개편 구상‘인무원려 필유근우’는 김 행장을 전략통으로 만든 철학이다. 2014년부터 경영전략 담당 부행장을 맡으면서부터 먼 미래를 보고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질문을 던지면 자료 없이도 바로 숫자를 던지며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오랜 기간 미래 전략을 고민한 결과다. 김도진표 개혁의 청사진은 이미 마련됐다. 그는 일단 인터넷전문은행의 출현,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 등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맞춰 조직개편에 들어갔다. 중복인력과 업무의 과감한 통폐합, 대과·대부서를 지향하는 조직슬림화를 모토로 한다. 그는 “전임자들의 잘잘못을 떠나 오랜기간 같은 조직편제를 쓰다보니 부서·그룹간 이기주의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김 행장은 “14~15년간 써왔던 조직편제를 한번 바꿔야겠다고 생각해도 컨설팅 받고 고민하다 보면 행장 임기 마지막 연차가 된다”며 “작년부터 기획부, 본부조직, 지역본부, 경영실적 평가에 대한 제도변경 등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행장이 되면서 이같은 구상들을 수면 위로 올려 실행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준비된 행장이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다. 기업은행은 오는 17일 조직개편안을 발표한다. ◇첫 영업일부터 현장 찾아...중소기업도 방문큰 전략은 이미 그렸고, 구체적인 전술은 현장에서 찾을 생각이다. 김 행장은 취임식에서부터 발로 뛰는 행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올해 첫 영업일부터 시무식 대신 영업현장을 찾은 것도 이같은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특히 김 행장이 찾은 인천 원당지점은 2005년 개점 때 그가 첫 지점장을 맡아 2년6개월간 일했던 곳이다. 인천과 경기지역에 위치한 중소기업도 방문해 어떤 지원을 원하는지 가감 없이 들었다. 초심을 잃지 않고 고객과 현장 중심의 경영을 펼치겠다는 의미다. 김 행장이 카드사업부 마케팅부장 시절 사업을 따기 위해 폭설에도 불구하고 직접 차를 몰고 지방으로 향했다가 경부고속도로에서 밤새 꼼짝없이 갇혔던 일화는 아직도 마케팅 직원들에게 회자된다. 당시 사업을 결국 따냈다.원당 지점장으로 일할 때에는 사비로 지점에 TV를 달고 근처 국밥집, 떡집 홍보영상을 틀어 개설점포임에도 불구하고 동일 그룹에서 1등에 오르기도 했다. 현장을 중시하다 보면 답이 보이고 추진력도 따라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책상에 앉아서 서류만 봐서는 현장에서 필요한 게 뭔지 알 수 없다”며 “직접 찾아다니면서 현장 중심의 경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임기를 마치는 3년 후의 기업은행 모습에 대해서는 “직원들이 기업은행 행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은행, 거래고객에게는 동반자 적인 은행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김도진 기업은행장은 누구30년 넘게 기업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전형적인 ‘기업은행맨’이다. 1985년 기업은행에 입행, 전략기획부장·카드마케팅부장·기업금융센터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2014년부터 경영전략그룹장을 맡아 행내에서 전략통으로 꼽힌다. 그의 강점은 ‘강력한 추진력’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스타일이다. 여기에 건강한 체력까지 갖추고 있어 행내에선 그의 별명으로 러시아 사람을 연상케한다며 ‘도진스키’라고 부른다. 그는 직원들과 격의없이 소통 하는것으로도 유명하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일상적인 소식을 전하기도하는 그는 부행장 시절에도 댓글 하나하나에 일일이 답하는 소통경영으로 유명했다. △1959년 경북 출생 △대륜고 단국대 경제학과 졸업 △1985년 중소기업은행 입행 △인천원당지점장 △2009년 카드마케팅부장 △2010년 전략기획부장 △2012년 남중지역본부장 △2013년 남부지역본부장 △2014년 경영전략그룹장(부행장) △2016년 제25대 기업은행장 대담 = 송길호 금융부장 정리 = 권소현 기자 juddie@edaily.co.k
- [데스크칼럼] 임종룡의 승부수
-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부장] 임종룡 금융위원장(이하 직책 생략)은 실용주의자다.이상에 얽매여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실리에만 치우쳐 명분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구조조정에 임하는 사즉생의 결기도 우리은행 매각을 위한 전략적 선택도 마찬가지다. 국·과장시절, 금융정책국과 경제정책국을 모두 섭렵한 특이한 이력이 이 같은 통합적 정책관을 형성했는지 모른다. 4전5기, 우리금융 민영화 방안은 절묘했다. 예보 지분 51%중 30%를 4~8%씩 나눠 매각하는 쪼개팔기, 이를 통해 여러 대주주가 경영하는 과점모델의 구축, 잔여지분 21% 추후 매각…. 인수 후보자를 늘려 흥행에 불을 지피고 차후 지배구조의 밑그림을 제시했다. 비현실적인 일괄매각을 고집하던 이전 방식에 비해 확실히 진일보한 전략이다. 사실 임기초만 해도 임종룡의 머리속엔 우리은행 매각이 우선순위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사석에서 토로했다.“우리은행 매각 문제는 나중에…” 정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메가톤급 이슈에 집착하다간 정작 필요한 금융개혁과제들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결정적일때 치고 나왔다. 대우조선해양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공감대, 그에 따라 민영화의 명분이 고조되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과감히 승부수를 던진 거다. 그동안 우리은행 민영화에 진척이 없었던 건 정부의 의지 부족이 크다. 책임의 문제, 보신주의의 만연이다. 변양호 신드롬이 팽배한 현실에서 국부유출, 헐값매각 등 각종 논란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대형 은행 매각에 적극적으로 나설 유인은 없었을 터이다. 정치권과 이에 편승한 관료들의 암묵적 이해관계도 일치했다. 공공기관은 물론 유사 공공기관들은 선거에서 이긴 정치세력들에겐 일종의 전리품.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행장으로, 감사로, 때로는 사외이사로 낙하산을 대거 내려보낼 수 있는 알토란 같은 대형 은행을 굳이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을 터이다. 비뚤어진 엽관주의의 폐해다. 불행히도 그 대가는 참혹하다. 정권마다 자행된 코드인사, 각종 인사개입과 청탁, 그에 따른 조직내 무기력. 민영화가 공회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은행의 경쟁력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주가는 1만원선을 겨우 턱걸이하며 장부가의 3분의 1, 경쟁은행의 절반수준에서 맴돈다. 주인 없는 은행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문제는 이번 매각 작업도 결코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은행산업 전반의 경쟁력 약화는 물론이다.민영화 이후에도 과연 관치의 망령을 떨쳐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 금융사 대표는 일갈한다. “정부는 단 1%의 지분만 있어도 감사원 감사를 통해 은행을 통제하려 한다. 설령 잔여지분을 모두 팔아 지분이 없어져도 지금의 국민은행처럼 우리은행을 그대로 놔둘리 없다.” 정부 지분 1%도 없는 국민은행 조차 관제은행처럼 정부의 인사개입이 일상화된지 오래다. 전신이 서민금융을 전담하는 특수은행이었던데다 2001년 합병 이후 끊임없는 관치의 잔혹사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비극적 관행이다. 15년간 정부 소유였던 우리은행엔 관제의 잔재가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다. 형식적 민영화를 이룬다해도 정치권과 관료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다.관건은 결국 관치의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있다.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우리은행이 관치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자율경영이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은 물론이다. 이는 곧 지시와 통제가 아닌 자율과 책임의 금융관행을 정립하는 일과도 맥을 같이 한다. 우리은행의 실질적 민영화를 통해 금융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일, 임종룡표 금융개혁의 완결판이다.
- [데스크칼럼]'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부장]구조조정은 진검승부다. 선혈이 낭자한 백병전이다. 뼈를 깎는 고통, 피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혼돈의 연속이다. 구조조정의 칼을 휘두르는 검투사는 그래서 그 결말을 너무 잘 안다. 자신이 휘두른 칼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언제든 자신을 겨눌 수 있다는 사실을. 외환위기 당시 이헌재가 그랬고 지금의 임종룡이 그렇다. 그들은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바로 사즉생(死卽生)의 결기다. 부실과 무능의 파노라마. 구조조정 실무라인은 오작동이다. 지휘관은 푯대를 향해 ‘진격 앞으로’를 외치지만 전사들은 좌고우면이다. 극도로 몸을 사리며 정해진 메뉴얼에 따라 면피의 기술을 동원하는데 급급하다. 국책은행도 금융감독원도 금융위원회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무기력의 팽배, 복지부동, 형식주의의 만연. 변양호신드롬의 확장판이다. “몸바쳐 일하는 후배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 사석에서 만난 변양호는 일갈한다. 이미 공직사회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미루는 건 보신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선의에 따라 최선의 결정을 내려도 후일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린 결정의 잣대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용되는 법. 검찰 수사도 감사원 감사도 국회 청문회도 모두 예측 불가능하다.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정조준된 책임의 화살은 피할 길 없다.감사원 감사는 특히 공포의 트라우마다. 감사원의 직무감찰은 재량의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한다.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 걸리면 영락없다. 기획감사, 표적감사, 모두 정무적 판단이 내재된 정치감사다. 한 금융공기업 대표는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1∼ 2년마다 정기감사를 나오면서 이번엔 갑자기 5년전 내용을 들추더라. 예측불가능하니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직원들은 극도로 몸을 사린다” 구조조정은 결단의 과정이다. 부실기업 매각과정은 단적인 예다. 채권단간 이해관계가 제 각각인 상황에서 채무재조정, 신규자금 투입, 제3자 매각 등 일련의 과정은 순간순간 책임 있는 결단을 요구한다. 최선의 결정을 내려도 헐값매각, 특혜시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책 결정에 대한 감사는 면책의 불문율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곧 예측 가능한 감사다. 그래야 사후 책임의 압박에서 벗어나 복잡한 구조조정의 실타래를 풀어나갈 수 있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면책은 책임체계의 명확한 정립을 전제로 한다.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가 원활히 작동할때 이뤄진다. 그 배후에는 공적 신인도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있다. 위기 대응과정에서 각종 선택의 결과에 대해 포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트루먼의 모토, 이후 미국의 대통령들이 지침으로 삼았던 바로 그 메시지다. 드라마틱한 위기극복의 역사에는 대통령의 책임 있는 결단이 있었다. 클린턴은 1995년 멕시코 금융위기 당시 “단임으로 끝날 수 있다”는 보좌진의 경고에도 구제조치를 밀어붙여 위기의 전이를 막았다.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부시는 부실 금융기관 구제금융결정과정에서 의회와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자신의 책임을 담보로 신속하고 일관성 있는 대응을 이끌었다. 나라 전체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정치적으로 인기 없는 결정을 내리는 일은 물론 녹록지 않다. 그러나 끊임 없이 밀려오는 선택의 순간에 책임 있는 리더의 분명한 언명이 없으면 참혹한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공직사회를 움직이기 어렵다. 험난한 구조조정의 여정에서 사즉생의 결기는 바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리더의 분명한 메시지에서 시작된다.
- [데스크칼럼]임종룡의 거친개혁
-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부장] 핑안(平安)은 중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대표 금융그룹이다. 1988년 직원 13명으로 시작, 28년만에 직원 21만명 자산규모 820조원의 글로벌 100대 기업으로 도약했다. 비약적인 성장의 배경엔 철저한 성과주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핑안의 인사와 보상체계는 웬만한 글로벌 기업보다 유연하다. 직원 보수중 기본급 비중은 단 30%,나머지 70%는 실적과 연동된 성과급이다. 직급과 직무간 인력운용도 원활하다. 임원을 하다 실적이 부진하면 부장으로 내려가고 성과를 내면 다시 임원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실적에 연동된 보상과 인사, 바로 성과주의 문화의 전형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착한 개혁’을 넘어 ‘거친 개혁’을 향해 질주한다. 은행권 성과연봉제 도입을 금융개혁 2라운드의 핵심과제로 제시하고 금융권을 압박하고 있다. 핑안그룹 처럼 실적에 따른 보상과 인사를 통해 무기력에 빠진 은행 조직에 활기를 불어 넣어 경쟁력을 끌어올린다는 포석, 비장감이 감돈다. “전체 인력의 30%는 프리라이더(free rider·무임승차자)들이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금융공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토로한다. 조직을 맡아 내부를 들여다보니 성과와 무관하게 책정되는 직원의 급여체계에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전체 급여의 90%이상이 기본급. 대기발령 직원의 월급도 일반 직원과 큰 차이 없을 정도니 조직엔 보신주의, 무사안일이 팽배할 수밖에 없다.국내 은행의 조직문화는 참 경직적이다. 적당히 일해도 월급봉투는 두둑하고 일정 직급까지 오르는데 문제 없다. 연공서열에 따라 전체 급여의 평균 88%는 호봉에 따른 정액급여. 그 결과 금융산업의 경쟁력은 아프리카 후진국 수준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직원 1인당 연봉은 8800만원에 달한다. 생산성이 비슷한 500인 이상 대기업 직원(5996만원)의 1.5배다.(2014년말, 공공알리오) 성과와 보상의 완벽한 미스매치다. 그렇다고 방만한 조직에 메스를 들이대는 건 녹록지 않다. 노조 동의 없이 단체협약을 뜯어고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기관장들은 한낱 지나가는 나그네. 단명(短命)의 CEO에게 협상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력한 지배주주가 없어 정부가 주인행세를 하는 은행이나 금융공기업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고질적 관행이다. 돌이켜보면 이 같은 적폐는 정치권과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금융권의 주요 포스트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정치권력과 퇴직 후 노후보장용으로 생각하는 경제관료. 정치금융, 관치금융의 어두운 그림자다. 이들을 등에 업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기관장과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한 노조. 공존공생, 야합의 앙상블이다. 임종룡의 거친개혁은 그래서 노조와의 일전(一戰)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치금융과 관치금융의 얼룩진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과단성을 필요로 한다. 금융기관 CEO에겐 노조에 대한 협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카드를, 정치권과 금융당국엔 오랜기간 은행의 자생력을 떨어뜨려왔던 각종 반칙과 변칙을 억제할 수 있는 제동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은행권 성과연봉제 도입은 결국 정치금융, 관치금융의 적폐를 청산하는 일과 맥을 같이 한다. 성과주의 도입의 관건은 객관적인 평가체계를 확립하는 일. 노조 반발을 무마하고 설득과 독려를 통해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선 정치권과 정부부터 변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반칙과 변칙이 난무한 금융 현실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성과주의 문화를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일 뿐이다.
- [데스크칼럼] 임종룡표 금융개혁의 한계
-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부장] 임종룡 금융위원장의 얼굴엔 요즘 웃음기가 사라졌다. 금융개혁의 야전사령관으로 취임한지 7개월. 불철주야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돌아오는 평가는 극히 박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금융 보신주의 타파를 외치며 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를 계속 압박하고, 경제부총리는 국내 금융의 저생산성을 지적하며 지지부진한 개혁작업을 질타한다. 급기야 새누리당은 금융개혁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며 개혁의 구심점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이젠 집권 여당과 주도권 다툼까지 벌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난마처럼 얽힌 개혁의 과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시름은 점점 깊어진다. “금융규제 개혁을 절대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임종룡표(標) 금융개혁의 핵심은 역시 금융규제 타파다. 각종 업무영역 규제, 상품규제는 물론 법적 근거가 없는 구두지시나 가이드라인을 통한 그림자 규제까지 이젠 고질병이 된 규제 덩어리들을 일거에 혁파하는 작업이다. 적발·제재위주의 검사관행 개선, 컨설팅 형식으로의 전환, 금융사와의 소통을 위한 ‘핫라인’ 구축. 금융당국의 고압적인 검사관행에 대한 일대 혁신과제도 도마위에 올린다.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할 듯 하지만 불행히도 일선 현장에선 도무지 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확성기에서만 울려퍼지는 공허한 외침, 개혁은 이미 미로속을 헤메고 있다. 이유는 자명하다. 일련의 개혁작업이 금융당국, 바로 공급자적 시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한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사석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금융규제, 현장검사 모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금융소비자들에겐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리 현란한 미사여구로 치장한다고 해도 금융소비자들 눈으로 보면 ‘금융당국과 금융사,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문제’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며칠전 발표한 금융부문 경쟁력 지표를 통해 국내 금융은 또다시 희화화되고 있다. 물론 금융부문 경쟁력이 아프리카의 후진국 우간다보다 뒤쳐진다는 조사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국가별 경쟁력를 재는 척도로 삼기엔 평가항목의 객관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전체 8개 항목중 정량 지표는 1개일 뿐 나머지 7개 지표가 자국 기업인들의 ‘주관적인’ 설문조사결과를 따른다. 곱씹어볼 대목은 여기에 있다. 금융부문의 수요자, 바로 국내 기업인들이 바라보는 금융부문이 그들의 기대치를 크게 밑돌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이 갤럽을 통해 실시한 금융신뢰지수 설문에서 금융정책의 적정성과 금융감독기관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낙제점으로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외환위기 당시 폭풍우처럼 진행된 김대중정부의 구조개혁. 이후 역대 정부는 한결같이 금융부문의 혁신을 전면에 내세웠다. 노무현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 이명박정부의 녹색금융, 박근혜정부 초창기 창조금융…. 모두 현란한 구호를 통해 정권의 레테르에 맞는 금융혁신을 공언했다. 하지만 모두 변죽만 울린채 물거품처럼 사라진 건 금융부문의 혁신이 정치적 슬로건으로 형해화 (形骸化)될 뿐 금융소비자들 입장에선 체감할만한 정책처방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당국, 공급자의 입장이 아닌 금융 소비자의 관점에서 금융개혁을 진행할 일이다. 금융은 경제의 혈맥이며 경제성장의 토대. 경제성장과 국민편의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혁신의 불꽃을 지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토록 유도하고, 금융발전의 혜택을 소비자들이 최대한 공유할 있도록 제도적 틀을 설계하는 일. 금융개혁의 패러다임 전환 없이는 모두 신기루일 뿐이다.
- [데스크칼럼]재벌의 진화
-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부장] 규제의 목적은 피규제자의 의식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회적 기준에 부합되는 책임있는 행동을 유도할때 의미가 있다. 하지만 위기때 도입되는 규제는 과잉인 경우가 많다. 문제가 발생하면 또 다른 규제를 만들고 실패하면 또 다른 규제를 양산해내는 악순환의 고리, 바로 규제의 블랙홀이다. ‘롯데사태’는 재벌체제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다. 극소수 지분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이용해 그룹 전체를 통제하는 총수의 전횡, 불투명한 지배구조에 의한 후진적 승계방식과 경영권 분쟁,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호비방과 퇴행적 행태…. 황제경영의 전근대성· 재벌체제 부조리의 집대성이다. 3주간에 걸쳐 진행된 롯데시네마의 저질드라마, 공분을 일으키며 재벌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한다.1960년대말 스웨덴 스톡홀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발렌베리 본사 앞은 연일 시위대의 물결로 넘쳐났다. 기득세력에 대한 저항을 모토로 내건 급진 학생운동(68혁명)이 전 유럽을 휩쓸면서 발렌베리 가문도 집중공격을 받은 거다. 지금이야 바람직한 재벌의 모델로 평가받지만 당시만 해도 발렌베리 가문은 정경유착· 경제력 집중· 세습경영, 이른바 시대 착오적인 기득권 세력의 상징으로 내몰렸던 셈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대응은 정공법이었다. 스웨덴식 대타협, 경영권 세습을 인정받은 대신 기업 소유권을 사회에 돌려주며 책임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계열사의 정점에 있는 공익재단을 통해 사회공헌을 이어갔고 사치를 자제하며 국민 속으로 파고들었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가문의 원칙은 이때 확립됐다. 발렌베리의 진화는 결국 스스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결과다. 권위주의 시대 재벌 통제는 산업정책과 정책금융, 2가지 시스템을 통해 이뤄졌다. 정부가 직접 산업정책을 설계하고 부족한 자본을 배분하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선 정치권력의 재량적 통제가 가능했다. 반면 민주화된 체제에선 원칙적으로 법과 제도에 기반을 둔다. 회계 투명성 제고· 사외이사제 도입· 소액주주권 강화 등 총수 전횡을 감시하는 메카니즘은 모두 외환위기 이후 10여년간 각종 개혁작업의 일환으로 도입된 재벌 규제장치다. 불행한 건 명시적 규제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피규제자들은 언제나 법과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며 우회로를 찾는다. 가공자본을 통해 소유권과 의결권의 괴리를 가져오는 기형적 지배구조, 순환출자고리의 정점에 있는 불투명한 비상장사, 총수의 자의적 권한을 뒷받침하는 거수기 이사회, 탈법적인 경영승계…. 각종 규제장치의 도입에도 일부 재벌들은 통제의 법망을 벗어나는 각종 반칙과 변칙을 통해 여전히 전횡을 일삼는다.그렇다고 무분별한 규제 강화만이 해법은 아닐 터이다. 안정적인 지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규 순환출자 뿐 아니라 기존 순환출자의 고리까지 끊는다면 계열사의 주력 기업은 경영권 위협은 물론 외국자본에 교란당할 수 있다. 규제의 본질은 끊임없는 자기증식이라고 할때 규제의 실패를 더욱 강력한 규제로 밀어붙이는 건 자칫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는 일이다. 법과 제도적 장치만으로 재벌의 일신을 기대할 수 없다면 답은 자명하다. 위기를 기회로 돌파한 발렌베리 가문의 예처럼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지렛대로 재벌들이 자발적인 해법을 제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소유권은 특권이 아닌 책임’. 발렌베리 가문에 도도히 흐르는 자기성찰의 원칙처럼 재벌 스스로 진화할 일이다. 지금과 같은 정치 사회적 요구에도 기존 관성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제2의 롯데사태’는 양태만 달리 할뿐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
- [데스크칼럼]재벌의 진화
-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부장] 규제의 목적은 피규제자의 의식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회적 기준에 부합되는 책임있는 행동을 유도할때 의미가 있다. 하지만 위기때 도입되는 규제는 과잉인 경우가 많다. 문제가 발생하면 또 다른 규제를 만들고 실패하면 또 다른 규제를 양산해내는 악순환의 고리, 바로 규제의 블랙홀이다. ‘롯데사태’는 재벌체제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다. 극소수 지분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이용해 그룹 전체를 통제하는 총수의 전횡, 불투명한 지배구조에 의한 후진적 승계방식과 경영권 분쟁,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호비방과 퇴행적 행태…. 황제경영의 전근대성· 재벌체제 부조리의 집대성이다. 3주간에 걸쳐 진행된 롯데시네마의 저질드라마, 공분을 일으키며 재벌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한다.1960년대말 스웨덴 스톡홀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발렌베리 본사 앞은 연일 시위대의 물결로 넘쳐났다. 기득세력에 대한 저항을 모토로 내건 급진 학생운동(68혁명)이 전 유럽을 휩쓸면서 발렌베리 가문도 집중공격을 받은 거다. 지금이야 바람직한 재벌의 모델로 평가받지만 당시만 해도 발렌베리 가문은 정경유착· 경제력 집중· 세습경영, 이른바 시대 착오적인 기득권 세력의 상징으로 내몰렸던 셈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대응은 정공법이었다. 스웨덴식 대타협, 경영권 세습을 인정받은 대신 기업 소유권을 사회에 돌려주며 책임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계열사의 정점에 있는 공익재단을 통해 사회공헌을 이어갔고 사치를 자제하며 국민 속으로 파고들었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가문의 원칙은 이때 확립됐다. 발렌베리의 진화는 결국 스스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결과다. 권위주의 시대 재벌 통제는 산업정책과 정책금융, 2가지 시스템을 통해 이뤄졌다. 정부가 직접 산업정책을 설계하고 부족한 자본을 배분하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선 정치권력의 재량적 통제가 가능했다. 반면 민주화된 체제에선 원칙적으로 법과 제도에 기반을 둔다. 회계 투명성 제고· 사외이사제 도입· 소액주주권 강화 등 총수 전횡을 감시하는 메카니즘은 모두 외환위기 이후 10여년간 각종 개혁작업의 일환으로 도입된 재벌 규제장치다. 불행한 건 명시적 규제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피규제자들은 언제나 법과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며 우회로를 찾는다. 가공자본을 통해 소유권과 의결권의 괴리를 가져오는 기형적 지배구조, 순환출자고리의 정점에 있는 불투명한 비상장사, 총수의 자의적 권한을 뒷받침하는 거수기 이사회, 탈법적인 경영승계…. 각종 규제장치의 도입에도 일부 재벌들은 통제의 법망을 벗어나는 각종 반칙과 변칙을 통해 여전히 전횡을 일삼는다.그렇다고 무분별한 규제 강화만이 해법은 아닐 터이다. 안정적인 지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규 순환출자 뿐 아니라 기존 순환출자의 고리까지 끊는다면 계열사의 주력 기업은 경영권 위협은 물론 외국자본에 교란당할 수 있다. 규제의 본질은 끊임없는 자기증식이라고 할때 규제의 실패를 더욱 강력한 규제로 밀어붙이는 건 자칫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는 일이다. 법과 제도적 장치만으로 재벌의 일신을 기대할 수 없다면 답은 자명하다. 위기를 기회로 돌파한 발렌베리 가문의 예처럼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지렛대로 재벌들이 자발적인 해법을 제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소유권은 특권이 아닌 책임’. 발렌베리 가문에 도도히 흐르는 자기성찰의 원칙처럼 재벌 스스로 진화할 일이다. 지금과 같은 정치 사회적 요구에도 기존 관성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제2의 롯데사태’는 양태만 달리 할뿐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
- [데스크칼럼]빗나간 경기부양
-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부장] 경기부양은 정책의 앙상블이다. 재정과 통화, 거시정책들의 정교한 조합으로 이뤄진다.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그러나 정책의 전달체계를 정비해야 하는 법. 경제의 혈맥 금융시스템이 오작동하면 확장적 재정정책도, 완화적인 통화정책도, 탄력적인 환율정책도, 그 어떤 부양책도 통(通)할 수 없다. 정부가 올해도 경기부양 패키지를 선보였다. 46조원+α의 규모에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추경, 정책금융…. 단골메뉴들이 예외없이 등장했다. 한국은행도 역대 최저치의 저금리기조를 유지하며 화답한다.재정과 통화를 아우르는 정책조합, 예년처럼 경기부양의 필요조건은 마련됐다. 하지만 지도에도 없는 길로 포장된 1년전의 부양책처럼 정책효과는 미지수다. 부양책의 약발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이유는 자명하다. 정책이 구현되기까지의 적지 않은 시차,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의 발생,정치권의 무능과 비협조. 한결같이 정책당국이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들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정책의 전달체계에 있다. 통화정책의 파이프라인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부양책의 효과가 잠식되고 있다. 1990년대초 일본이 그랬다.자산버블이 붕괴되고 금융시장이 디플레이션에 빠진 상태에서 일본 정책당국은 대대적인 부양책을 펼쳤다.제로 금리상태를 유지하며 금융부문에 유동성을 투입하고 재정지출을 통해 자금을 공급했다. 하지만 경색된 금융시장에 찔끔찔끔 풀린 돈은 소비와 투자로 연결되지 않았다. 대신 가계와 기업의 금고로 흘러들어가 경기진작의 마중물이 될 수 없었다. 신용경색을 제거하기 위한 근본적인 구조개혁 없이 단기 부양책만 골몰한 결과, 실탄만 낭비한 채 20년 장기불황의 터널에 빠지게 된 거다. 국내 금융시장도 일본 금융시장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돈맥경화에 걸린 듯 돈이 돌지 않고 있다. 이미 유동성의 함정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실제 확장적 재정지출, 완화적인 통화정책으로 시중에 돈은 많이 풀렸지만 통화유통속도(회전율)가 떨어지며 통화승수(본원통화 한 단위가 몇 배의 통화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 는 계속 하락하고 있다. 은행의 자금중개기능· 신용창조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신용경색이 심화되고 있다. 금융시장에 돈이 돌지 않는 건 은행권의 보신주의 탓도 있다.위험회피성향이 높아진 은행들은 중소기업대출보다는 대기업대출, 신용대출보다는 주택담보대출을 선호하고 있다. 일시적 자금난에 빠진 기업들에 대한 신용보강이 적절히 이뤄질리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제도적 제약이다. 지난 2009년 은행의 건전성 규제를 위해 금융당국이 예대율(대출액에 대한 예금액의 비율)을 100%이내로 제한한 이후 은행들의 대출여력은 크게 약화됐다. 은행들이 돈을 풀 수 있는 연결망을 타이트하게 봉쇄한 채 신용경색에 빠진 금융시장에 돈만 살포하니 정책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신용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에서의 부양책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공산이 크다. 마치 모르핀를 맞아 연명하는 환자와도 같다. 모르핀을 계속 투여하지 않으면 언제 쓰러질지 모르듯 펀더멘탈이 약해진 나라경제는 부양책을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지는 법이다.결국 금융시스템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확장적인 거시정책과 금융개혁을 연결할 일이다. 여신규제를 탄력적으로 완화하고 금융기관의 리스크 회피 현상을 줄이는 유인체계를 통해 신용경색을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금융시스템에 돈이 제대로 돌도록 유도하고 실물경제를 튼튼히 뒷받침하도록 금융부문을 재설계하는 일, 금융개혁의 화살은 이 같은 신뢰의 제고를 정조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