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월드에 선 버추얼 아티스트[정덕현의 끄덕끄덕]

  • 등록 2024-09-19 오전 5:00:00

    수정 2024-09-19 오전 8:27:58

[정덕현 문화평론가] 텅 빈 밤거리를 한 소녀가 걸어간다. 음악이 흐르고 그 소녀의 모습은 실사에서 툰스타일의 2D로, 또 캐주얼 3D로 변신한다. 변신할 때마다 전자음이 들리고 픽셀이 흩어지고 뭉쳐지는 이미지를 통해 이 존재의 특이성이 설명된다. ‘던’(Done)이라는 첫 번째 싱글 앨범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이 소녀의 이름은 ‘나이비스’(naevis)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에스파(aespa)의 세계관에서 탄생한 버추얼 아티스트다. 사람은 아니지만 인공지능(AI)과 시각특수효과(VFX) 기술을 결합해 만들어낸 버추얼 아티스트. 그가 공식적으로 첫 번째 싱글을 내고 본격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최근 몇 년간 AI를 활용한 보이스 기술과 다양한 모델링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버추얼 휴먼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모델로 활동하기도 하고, 인플루언서, 유튜버로 활동하기도 하며 음원을 내고 가수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도 생겨났다. 사실 1998년 국내 1호 사이버 가수로 아담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20여 년 만에 이런 놀라운 기술 발전에 의한 진화가 생겨날 거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당시 사이버 가수 아담 시연회를 통해 내놓은 아담소프트 측의 선언은 이 분야에 대한 창대한 꿈이 담겨 있었던 건 사실이다. 당시 아담소프트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적인 디지털 혁명의 시대는 이제 문화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갓 탄생한 아담은 외형이 완성된 수준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AI, 목소리 합성 등의 기능을 더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문화의 전사로서 발전시킬 것이다.”

당시 아담은 그 차별성 때문에 괜찮은 성과를 냈다. 1집 앨범을 20만 장 판매했고 광고 모델도 했으며 갖가지 캐릭터 상품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창대했던 포부와 달리 지속 가능하기는 어려웠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에 기술력이 따라주지 않았고 또 하나는 버추얼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그때까지만 해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6년이 훌쩍 지난 현재는 어떨까. 나이비스를 보면 그 옛날 아담의 탄생과 함께 꾸었던 꿈이 이제 막 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진화한 VFX와 AI 기술이 어우러져 거의 실제와 가까운 3D 캐릭터 애니메이션이 구현됐고 목소리 또한 AI 보이스로 만들어져 인간과 기계 사이의 어느 지점을 들려주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나이비스의 싱글 ‘던’ 뮤직비디오는 바로 이러한 점을 시연해 보임으로써 드디어 이 세계가 본격적으로 열렸음을 말해준다.

SM엔터테인먼트의 버추얼 아티스트 나이비스.(사진=SM엔터테인먼트)
앞서 아담이 마주한 두 가지 장벽인 기술력과 가상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지금도 완벽하게 해결됐다고 보긴 어렵다. 이 두 장벽이 야기하는 건 바로 ‘불편한 골짜기’(Uncanny Valley)다. 아이러니하게도 버추얼 아티스트는 실제와 너무 멀어도, 또 실제와 너무 가까워도 불편함이 느껴진다. 너무 먼 건 조악해서, 너무 가까운 건 마치 완벽한 마네킹이 사람을 흉내 내는 것처럼 보여 오싹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아닌 버추얼 형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인식과 감각의 문제인데, 이를 극복할 방법은 꽤 오래전부터 고민돼왔다. 그 하나는 차라리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드러내는 방식이다. 기시로 유키토가 그린 만화 ‘총몽’을 원작으로 한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실사영화 ‘알리타’는 인간의 두뇌를 보유한 기계 소녀 알리타의 눈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구현했는데 이건 원작이 그렇기도 하지만 불편한 골짜기를 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걸 아예 캐릭터 이미지로 드러냈기 때문에 보는 데 별 불편함이 없었던 것이다. 나이비스의 뮤직비디오에서 굳이 툰 스타일 2D와 캐주얼 3D를 혼용하는 건 비즈니스적 포석의 의미도 있지만 바로 이런 불편한 골짜기를 넘어서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국내에서 현재까지 가장 성공한 버추얼 아티스트로 꼽히는 플레이브가 지닌 강점도 같았다. 실사 3D가 아닌 툰 스타일의 2D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실제 아티스트들이 뒤에서 본체로서 활동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개념 자체는 사이버 가수 아담과 똑같지만 달라진 기술력이 완벽한 차이를 만들었다. 리얼타임 기술을 통해 실시간 소통과 콘서트도 가능한 플레이브는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내세움으로써 이 가상 개념에 팬들을 과몰입하게 만들었다.

나이비스는 이 불편한 골짜기를 넘기 위해 꽤 공을 들여 탄생했다. 일단 바로 등장한 게 아니라 에스파의 등장과 함께 그 세계관을 통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 그렇다. 에스파는 사실상 태생적으로 바로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세계를 열겠다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의지가 담긴 걸그룹으로 세계관 자체가 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가 연결되고 결합하는 형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에스파라는 그룹명 자체가 그렇다. 에스파(aespa)는 ‘아바타 × 익스피리언스’(Avatar × Experience)를 표현한 ‘ae’에 영단어 ‘aspect’(애스펙트·양면)가 합쳐진 이름이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아바타를 통한 두 세계(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를 경험하라는 뜻일 거다. SM엔터테인먼트는 에스파의 등장과 더불어 그 세계관을 담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내놨는데 거기에는 리얼 월드에 사는 이들과 짝을 이루어 버추얼 세계에 생겨난 ‘아이(ae)’라는 일종의 아바타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애초 에스파의 멤버는 카리나, 윈터, 지젤, 닝닝만이 아니라 이들과 각각 연결된 ae들을 합쳐 8명이다. 아바타 개념의 버추얼 아티스트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비스는 이 세계관 속에서 리얼 월드의 에스파를 버추얼 월드로 인도하고 그곳을 경험하게 해주는 중간 매개자로 등장한다. 본래 그곳을 벗어나면 안 되는 존재지만 에스파를 돕기 위해 그곳을 벗어나는데 이것은 버추얼 캐릭터가 일종의 ‘자유의지’를 갖는 과정처럼 그려진다. 나이비스는 이 에스파의 세계관을 통과해 리얼 월드로 나오는 것이고, 그래서 ‘던’이라는 싱글은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출사표가 되는 셈이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에스파의 세계관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장 폴 사르트르의 이 문구는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세계에 대해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가 사라질 거라는 걸 예고하고 있다. 본질이 버추얼이라도 그것이 세상을 움직인다면 실존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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