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권효중 기자]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연을 TV를 통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EBS의 교양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이 이달부터 더빙을 제공하지 않고 ‘자막’만을 제공해 ‘접근성 침해’라는 논란에 부딪혔다. 모두에게 지성을 전달해준다는 프로그램의 취지와는 달리 자막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이해하기 어려운 고령층 등이 배제됐다는 것이다.
| 지난 15일 방영된 EBS ‘위대한 수업’ 브라이언 슈미트 편, 자막이 제공되고 있다. (사진=EBS ‘위대한 수업’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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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는 지난해 8월부터 폴 크루그먼, 유발 하라리, 주디스 버틀러 등 세계적인 석학이 직접 강연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인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를 방영 중이다. 이 프로그램은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지원을 통해 제작진이 직접 석학들을 섭외하고 질 높은 강연을 제공해왔던 만큼 “수신료의 가치가 크다”는 시청자들의 평가를 받아왔다. EBS뿐만이 아니라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6개 언어로도 제공된다.
‘위대한 수업’은 본인의 모국어로 말하는 강연자의 목소리에, 한국어로 말하는 성우 더빙을 입혀 영상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지난달 ‘위대한 수업’ 제작진 측은 “더빙 대신 원어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많았다”며 이달 방송부터 더빙 대신 자막으로 변경한다고 밝혔다. 이에 지난 1일 방영된 ‘마이클 샌델’ 편부터는 더빙 대신 자막이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더빙 대신 자막만이 제공되는 건 일부 시청자들의 접근권을 침해할 수 있다. 지난 13일 자신을 시각장애인이라고 소개한 한 시청자는 ‘위대한 수업’에 더빙 서비스를 요청하며 “자막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더빙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일부 시청자들의 민원만 수용하지 말고 더빙이 꼭 필요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자막이 필요하다는 다른 시청자들의 요청도 뒤따랐다. 이들은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노인이라서 자막을 읽기 힘들어하는 어머니와도 방송을 보고 싶다’. ‘모두에게 지식이 전달돼야 하는데 시각장애인을 포함, 자막 접근이 어려운 이들을 배제하지 말라’고 했다.
EBS 관계자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 “시청자들의 의견을 인지했으며, 다시 더빙을 제공할지의 여부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각장애인을 포함, 자막을 읽기 어려운 이들을 위한 ‘더빙’ 콘텐츠가 부족한 건 EBS만의 문제는 아니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등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에서도 마찬가지다. 디즈니 플러스는 콘텐츠 더빙을 제공하고, 넷플릭스는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해 읽는 ‘음성 변환’(TTS) 서비스와 오디오 화면 해설 기능을 제공한다. 다만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 콘텐츠에는 지원되지 않는 만큼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콘텐츠 더빙을 맡고 있는 성우들은 시각장애인뿐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보 접근권을 위해 더빙이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최재호 한국성우협회 사무총장은 “더빙은 시각장애인뿐만이 아니라 자막 이해가 어려울 수 있는 노령층, 미취학 아동 등을 위해서 꼭 필요한 권리이고 이들을 모두 합하면 전 국민의 4분의 1에 달할 만큼 보편적인 문제”라며 “정보접근권이라는 기본권 차원에서 더빙의 필요성이 이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