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수의 경세제민]'불편한 진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 등록 2022-12-08 오전 5:15:00

    수정 2022-12-08 오전 5:15:00

[유지수 국민대 전 총장·명예교수] 지난 3일 우리나라의 월드컵 16강 진출 장면은 이태원 참사, 코로나 확산, 금리 인상 등으로 우울했던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황희찬 선수가 작렬시킨 역전 골은 국민들의 답답한 심정을 뚫어준 가뭄 속 단비 같았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는 경기 관람 후 일본 관중들이 관람석의 쓰레기를 치웠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이를 미국 관중과 비교, 미국인이 떠난 경기장은 쓰레기로 가득했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 관중의 행동에 대해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청소근로자가 고용돼 있는데 왜 굳이 관중이 이를 치워야 하느냐, 일본 팬들이 수집한 쓰레기를 환경관리인들이 다시 분리해야 했다는 등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일본 팬들의 행위가 다른 국가의 본보기가 된 점은 사실이다. 일본 팬들의 행동을 본 다른 국가의 팬들도 경기가 끝난 뒤 관람석 등 경기장을 청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격은 그 나라 국민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 국민도 K팝·반도체·전기차·IT기술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더해 시민의식으로도 타국의 귀감이 돼야 한다. 아무리 군사력·경제력을 갖춘 대국이라 해도 국민들의 행동이 세계시민의 귀감이 되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결코 존경받는 국가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선 일본을 칭찬하면 자칫 친일파로 몰릴 수 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국민 정서 때문이다. 한·일 양국이 이를 극복하려면 일본은 1993년 발표한 고노담화의 기조를 유지, 역사적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는 일본의 잘못에 대해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일본이 잘하는 것은 배워야 한다. 일본 관중이 카타르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회적 의무를 다하려는 의식을 우리도 갖춰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등한시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민주사회의 근간은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가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더욱 굳건해진다. 민주사회의 주인이 시민이라면 당연히 시민은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의식을 갖춰야 한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취임사를 통해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주기 바라기 전에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용기 있는 발언이다. 당시 미국의 정치 지형을 볼 때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라면 국가의 정책·제도가 잘못돼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는 역으로 국민의 의무를 강조했다. 국가를 이끄는 대통령이라면 바로 이런 용기와 소신이 필요하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의무를 강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권리가 아닌 의무를 강조하면 이에 따른 정치적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 역사에서 다른 국가에 잘못한 사실에 대한 인식과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나라 군인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 었었지만,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베트남 정부에 공식 사과한 적은 없었다. 물론 베트남 정부에서 이를 문제 삼지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잘못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 양민 학살사건은 전쟁 중이라서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필리핀의 코피노(Kopino) 문제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우리의 ‘불편한 진실’이다. 코피노(Kopino)는 한국 남성과 필리핀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이르는 말로 코리안(Korean)과 필리피노(Filipino)의 합성어다. 한국의 사업가·유학생·관광객 등이 1990년대 필리핀에 거주하면서 필리핀 여성과 동거해 낳은 자녀들은 1만5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일설에는 수십만명에 달할 것이란 얘기도 있다. 필리핀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기에 낙태하지 않고 출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가 없어 출생신고도 하지 못하고 피부색이 달라 현지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해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고 한다. 이는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라고 해서 여성을 육체적 쾌락의 대상으로 삼아 임신 시키고 도망쳐버린 사건이다. ‘K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국가의 국민이 한 행동으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우리의 어두운 면이 존경받는 국가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우리에게 잘못한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려면 적어도 우리도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양심적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인들의 발언은 모두 정치적 의미로 수용된다. 말 한번 잘못하면 극우파·극좌파·친일파·친미파 등으로 공격당할 공산이 크니 소신 발언을 하기가 쉽지 않다. 케네디 대통령도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했다면 소신 발언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기적을 만든 민족이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소위 ‘국뽕’이란 말로 폄훼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자부심이 없다면 국가·민족을 지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게 된다. 유대인이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다가 다시 이스라엘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표가 주어지면 반드시 해내는 놀라운 국민이다. 이제는 선진 국민으로 도약해야 할 때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발언이라도 거짓·왜곡이 아니라면 그 의견을 존경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모든 이슈에 대한 판단은 정치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진실과 사실에 기반해 내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불편한 진실을 밝히고 우리가 잘못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를 실행하면 우리는 진정한 선진국 시민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새해에는 불편한 진실을 자랑스러운 진실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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