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하고 펍도 가는 치매인…기억 잃어도 일상 잃지 않는 천국

[대한민국 나이듦]⑦ 네덜란드
'치매인 마을' 호그벡(The Hogeweyk) 가보니
병동 없고 시내 거리 옮겨 놓은 듯한 호스피스
"환자 아닌 거주자…평범한 여생 마무리 돌봄"
  • 등록 2023-08-09 오전 6:01:00

    수정 2023-08-09 오전 6:23:43

[비스프(네덜란드)=이데일리 김범준 기자] 치매에 걸려도 답답한 병원 대신 동네에서 평범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마음에 드는 옷차림으로 마실 나가 맑은 하늘과 날씨를 만끽할 수 있다면. 이웃과 함께 식사와 커피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면서 노래하고 연주하며 그림도 그릴 수 있다면 어떨까.

고령화 사회를 사는 치매 노인들에게 이와 같은 소박한 바람이 현실이 된 곳이 있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 센트럴역에서 기차와 도보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근교 도시 비스프에 위치한 ‘호그벡’(호헤베이크·The Hogeweyk). 이곳은 중증 치매인들이 한 마을처럼 모여 사는 세계 최초의 ‘치매마을’이다.

네덜란드 보건복지체육부(VWS)에 따르면 75세 인구 중 80% 이상이 만성 질환을 가지고 있고 치매 비율도 갈수록 늘고 있다. 이에 노인들이 집에서 더 머물며 세심한 보살핌과 요양시설 서비스 질 향상 등을 위한 ‘노인 돌봄을 위한 협약’을 2018년 3월 체결했다.

네덜란드 치매 요양시설 ‘호그벡’(호헤베이크·The Hogeweyk) 마을에 입주한 치매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고 있다.(사진=비비움 비)
세계 최초 ‘치매마을’…병동 대신 집 같은 일상생활

호그벡 치매마을은 의료복지 비영리기업 비비움(Vivium)그룹의 자회사 비 어드바이스(Be Advice)사가 운영한다. 1970년부터 이곳에서 여느 병원처럼 운영되던 호그베이(Hogewey) 요양시설을, 비 어드바이스가 2002년부터 마을 형태 호스피스 타운 건설을 시작해 2008년과 2010년 2단계에 걸쳐 치매마을 호그벡(The Hogeweyk)으로 탈바꿈시켰다.

지난 6월27일(현지시간) 이데일리가 방문한 호그벡은 암스테르담 시내 거리 한곳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광장엔잘 깔린 보도블록 따라 세워진 가로수와 벤치는 물론 곳곳에 위치한 건물엔 레스토랑과 바, 카페, 마트, 극장, 미용실, 음악실, 체육관, 액세서리숍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 공동설립자이자 총괄관리자 엘로이 반 할(Eloy van Hal) 선임 고문은 직접 호그벡 투어를 진행하며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치매 환자가 아니라 ‘치매인’으로 명칭한다”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치매를 단지 치료해야 하는 환자로 대하는 의학적 접근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똑같이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 접근으로의 전환”이라고 소개했다.

네덜란드 치매 요양시설 ‘호그벡’(호헤베이크·The Hogeweyk) 마을 광장 전경.(사진=비비움 비)
실제 이곳에선 환자복 대신 평상복을 입은 노인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걷고 쇼핑을 하며 이웃과 인사를 나눴다. 마치 치매에 걸리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처럼. 낯선 외부 동양인을 반기기라도 하듯 호기심 찬 눈인사와 함께 어디서 왔느냐고 인사를 건네는 거주민들도 있었다.

한 야외 테이블엔 마치 오랜 노부부처럼 보이는 남녀 한쌍이 다정하게 붙어 앉아 함께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즐겼다. 할 고문은 “저 둘은 실제 부부는 아니고 여기서 만났는데, 서로 취향이 잘 통하는지 매일 커플처럼 붙어다닌다”고 귀띔했다.

마트·카페 가며 취미도 마음껏…환자 아닌 사람으로

대지 면적 약 1만5000㎡으로 자리 잡은 호그벡에는 편의시설 건물동을 제외하고 27개의 집이 2층 건물로 마련됐다. 평범한 가정 같은 한 집마다 비슷한 문화권과 생활양식을 가진 7명의 치매인들이 입주해 동작 감지 설비가 마련된 공간에서 생활한다. 한 집당 요양사가 아침 2명, 낮 1명, 오후 2명, 야간 1명씩 교대로 상주하며 이들을 밀착 관리하고 관리팀이 요리와 청소·빨래 등 생활을 돕는다. 치매인 1명당 홈케어 인력은 0.87명 꼴이다.

호그벡에는 현재 평균 연령 85세의 치매인 188명이 흰 가운 대신 일상복을 입은 의사·요양사·관리인 등 260여명의 의료진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 마을의 목표는 치매인들이 ‘똑같은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입주자들의 자발적 일상생활 영위를 극대화하면서, 의료진의 개입은 최소화하는 게 원칙이다. 평범한 일상을 그대로 구현하려다 보니 입주자 1명당 거주비·인건비·운영비·약제비·식비 등 통틀어 연간 약 8만유로(약 1억1400만원)의 비용이 든다.

네덜란드 치매 요양시설 ‘호그벡’(호헤베이크·The Hogeweyk) 마을에 입주한 치매인들이 내부 음악실인 모차르트룸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고(왼쪽) 레스토랑에서 음식과 주류를 즐기며 대화하고 있다.(사진=비비움 비)
하지만 호그벡을 포함한 네덜란드 요양시설 입주자들은 비용을 해당 기관에 직접 납부하지 않는다. 호그벡의 경우 내부 마트와 식당 등 편의시설을 이용해도 직접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 이상을 소비하면 월 단위로 입주자 혹은 가족이 사후 정산한다.

네덜란드의 요양시설은 한마디로 전액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복지다. 일반 시민들이 평소 개별 소득·자산과 가족 상황에 따라 적게는 월 180유로(약 25만원)부터 많게는 월 2500유로(약 355만원) 수준까지 책정된 요양비를 납부하면, 정부가 각 요양시설 거주자 규모와 일수에 비례해서 운영비 등 예산을 일괄 지급하는 방식이다.

국가 사회보장 시스템으로 운영되다 보니 아무리 돈이 있고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입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부와 의료기관에서 깐깐한 심사를 거쳐 중증 치매 판정을 받아야 비로소 입주 자격이 주어진다. 현재 호그벡에는 밀려 있는 대기자가 4명이고 입주까지 평균 6~10개월이 소요된다. 거주 치매인들은 이곳에서 평균 2년6개월 가량 머물며 여생을 마무리하는데, 호그벡 의료진이 생애 말기 치료와 돌봄 서비스를 끝까지 책임진다.

할 고문은 “호그벡은 중증 치매인이라도 평소에 즐겨 하던 걸 금지하지 않는다. 핵심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라며 “치매인들에게도 앞으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이유와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호그벡의 콘셉트는 각 국가별 사회 제도에 맞춰 확산 가능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네덜란드 치매 요양시설 ‘호그벡’(호헤베이크·The Hogeweyk) 마을에 입주한 치매인들이 내부에 마련된 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사진=비비움 비)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통·번역 도움=이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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