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온 편지] 87. 부자들의 시민권 쇼핑

  • 등록 2018-09-27 오전 6:00:00

    수정 2018-09-27 오전 6:00:00

리스본 전경(출처=ptgoldenvisa.com)
[런던=이데일리 이민정 통신원] 외국인이 50만 유로(약 6억5000만원) 이상을 포르투갈 부동산 등에 투자하면 포르투갈 정부가 외국인이 자국에 1년 거주하고 이후 거주 기간을 갱신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이른바 ‘골든 비자’ 제도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의 여러 나라들이 이와 비슷하게 자국에 자본을 투자하는 외국인들에게 일정 기간 머물 수 있는 거주 비자를 주는데, 사실상 EU 협약에 따라 이 비자를 들고 있는 외국인은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유럽에 진출하고 싶은 부자 외국인들에게는 매력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범죄에 연루됐거나 재산을 부정 축재한 외국인 부자들이 유럽에 정착하기 위한 수단으로 투자 비자를 악용한다는 지적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나옵니다.

포르투갈은 지난 2012년 골든 비자 제도를 도입했는데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가 경제 재건을 위한 외자 유치 방안 중 하나로 적극적으로 운용했습니다. 50만 유로 이상을 포르투갈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포르투갈 경제 전반에 100만 유로를 투자하거나, 또는 10명 이상의 인원을 고용하는 사업체를 포르투갈에 세우는 외국인에게 골든 비자를 줬었죠. 골든 비자로 머물다가 6년 후 시민권을 취득하면 포르투갈이 아니라 유럽연합 내 어느 나라에서든 영구적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6416명의 외국 투자가가 포르투갈의 골든 비자를 취득했습니다. 이 가운데 60% 이상이 중국인 투자가였으며, 전체 95%가 부동산 투자로 골든 비자를 취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은 골든 비자 제도를 통해 지금까지 약 39억 유로를 거둬들인 것으로 추산됩니다. 부동산 투자를 통한 외국인들의 골든 비자 취득이 많아지면서 이 제도는 리스본과 포르토의 부동산 시장 호황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좌파연합 정당은 골든 비자 신청을 하는 신청자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돈 많은 외국인 범죄자들이 포르투갈 거주증을 취득하기 위해 골든 비자를 악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골든 비자 제도의 포르투갈 일자리 창출 효과도 미미하다고 꼬집습니다. 골든 비자를 취득한 6146명의 외국 부자 투자가 가운데 0.2%에 그치는 약 11명 만이 포르투갈에서 10명 이상을 채용하는 사업체를 세웠다는 점을 지목합니다.

이에 따라 이 정당은 골든 비자 제도를 없애는 법안 발의를 준비 중입니다. 이들은 “범죄와 연관된 돈이 아니라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투자, 돈 많은 외국인과 나머지를 차별하지 않는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골든 비자 제도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분위기에 당장 부동산 업계가 반발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가장 큰 부동산업계 연합인 APEMIP의 루이 리마 사무총장은 BBC에 “리스본과 포르투에서 오랫동안 필요로 했던 재개발 등은 골든비자와 연관된 투자 덕분에 가능하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골든 비자가 건설업 일자리와 청소 산업 등지에서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 왔으며 골든 비자 제도가 없어지면 건설업은 무너질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코임브라대 아나 산토스 이코노미스트는 골든 비자 제도가 포르투갈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는데 기여했으며 이 때문에 주택 시장이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골든 비자가 외국 부자 투자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점점 덜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영국에도 이와 비슷한 투자 비자가 있는데 ‘Tier1(투자) 비자’로 불립니다. 포르투갈 경우와는 달리 외국 투자자들이 영국 부동산 투자는 하지 못하게 하며 최소 투자 금액도 200만 파운드로 높습니다. 영국 정부에 따르면 작년 355명의 외국인 투자자가 이 비자를 취득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얼마 전 잉글랜드 프로축구 첼시의 구단주이자 억만장자인 러시아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이스라엘 시민권을 신청한 것이 알려졌었죠. 그는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가까우며 러시아에서 유전 사업 등으로 큰돈을 번 뒤 영국에서도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영국 정부가 영국 부동산 등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발급해 주는 투자 비자를 받아 영국을 드나들었었죠.

지난 3월 러시아 당국이 영국에 망명와 살던 러시아 이중첩자 세르게이 스크리팔 독살 배후로 의혹이 짙어지면서 영국과 러시아는 냉전 이후 최악의 관계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영국 정부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아브라모비치의 만료된 투자 비자 갱신 신청을 허가해주지 않고 있고, 그는 영국 입국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죠. 그가 이스라엘 시민권자가 되면 이스라엘과 영국의 무비자 방문 협정에 따라 단기간 영국 방문이 가능하게 됩니다.

영국, 포르투갈처럼 부자들에게 자국 투자를 대가로 장기간 투자 비자나 시민권을 내주는 유럽 국가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돈이 많으면 원하는 국가의 국적을 취득할 수도 있는 것이죠.

투자자 비자, 투자 이민 등의 개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최근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 성장과 맞물려 부자 기업가, 투자자들이 늘어나면서 자국이 아닌 외국의 시민권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분석했습니다. 이들은 경제가 안정적이고 사업이나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갖춘 곳, 아이들을 키우고 복지가 좋은 곳인 캐나다, 영국, 호주 등 선진국의 투자 비자나 국적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죠.

셍겐조약을 맺은 유럽 국가 간 통행의 자유를 보장하고 유럽 단일 시장 접근권을 누릴 수 있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시민권은 특히 인기가 많습니다. EU 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전 세계 150~170개국을 단기간 무비자 방문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절반가량의 EU 회원국들이 투자 비자나 시민권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몰타의 경우 국가개발펀드에 67만5000유로의 기금을 내고 35만 유로 규모의 몰타 부동산을 매입하는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줍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유럽 지중해 작은 국가 몰타의 경우 지난 2014년 이후 3년 동안 자국 투자 등의 대가로 약 800명의 외국 국적의 부자들에게 시민권을 줬습니다. 아일랜드정부는 아일랜드 경제에 100만 유로를 투자하면 투자 비자를 내줍니다.

사이프러스는 자국 부동산, 주식, 국채, 기업 등에 200만 유로를 투자해야 시민권을 줍니다. 불가리아는 5억 유로를 내면 거주허가를 내주고 이후 2년간 100만 유로 투자 등을 거치면 시민권을 딸 수 있게 해줍니다. 라트비아, 그리스, 스페인 등도 부동산, 주식 등에 일정 금액 이상의 투자를 하면 거주증을 주고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고 자격을 얻으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민권을 사고파는 것에 대해 비판 여론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몰타의 경우 러시아 안팎에서 논란이 많은 러시아 부호 등에게 종종 시민권을 주는데 이들을 유럽연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이들이 부정축재한 자금이 유럽으로 흘러들어와 돈세탁 수단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유럽연합 안보 위협까지 된다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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